<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사나운 꿈자리가 사흘, 나흘, 닷새, 엿새를 넘어 며칠인지도 모르게 계속되고 있었다. 눈빛이 매우 섬뜩한 어떤 사람이 나를 보는 것도 아니고 내 뒤의 무엇인가를 노려보는 꿈이었다. 증오심 플러스 복수심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될 것만 같은 그 이상하게 섬뜩한 눈초리가 나를 째려보는 것도 아니고 내 뒤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슴이 갈갈이 난도질을 당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는 기분으로 펄쩍, 깨어나곤 했다. 깨어나서 보면 등허리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용태를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얼굴은커녕 코도 없고 입도 없고 귀도 없이 오직 두 개의 눈동자와 살짝 찢어진 눈초리만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것은 분명 사람의 눈이었다. 호랑이가 호랑이를 알아보고 토끼가 토끼를 알아보듯이, 사람은 사람을 알아보기 마련이었다. 사람이 아닌 그 어떤 동물의 눈도 내 꿈에 등장한 그 눈과 닮아있지 않았다.

 

▲ 진도항 인근 마을

 

두 개의 눈동자는 어딘가를 살짝 건드리면 그 순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미인도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음직한 반달형의 곱상한 눈매임에도 불구하고 독기를 품고 있어서인지 어디서 무슨 신호가 있으면 대번에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 같았다. 이 세상 모든 원한과 증오심 그리고 복수심 같은 것들을 끌어다가 만들어놓은 것만 같은 그 눈, 그 눈동자, 그 눈초리는 이제 꿈이 아닌 생시에도 가끔 보였다. 길을 걷다가도 문득,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문득, 아무 생각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순간에도 불현 듯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증오심이 이글이글한 눈은 아무래도 내 영혼을 잠식해 버린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흉악한 사태란 말인가. 낯선 눈초리는 아니었다.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이 그 눈매는 내 기억에 매우 익숙했다. 하지만 딱히 누구라고 지목하기는 어려웠다. 대강 누구라고 집히는 이름조차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여자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여자의 눈과 남자의 눈은 성별을 완전히 감추고 본다 해도 남녀 구분이 가능하기 마련이었다. 아닌가? 나만 그런 느낌인 것인가? 어쨌든, 내 영혼을 잠식해 버린 그놈의 눈동자는 여자의 것이 분명했다.

그런 고약한 꿈 얘기를 내 옆의 그녀에게 했더니 그녀는 일도양단, 둘도 아닌 단 한 개의 문장으로 정리해 버리고 있었다. 내가 요즘 옛 애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도 나는 내심 크거나 작거나 인연이 있었던 여자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고 있었지만, 단 한 명도 꿈속에 등장한 그 섬뜩한 눈매를 가진 사람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헬조선이다 뭐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온통 절망의 노래뿐인 세상을 간신히 살아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런 숨통을 꼭꼭 조여 매는 꿈자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보름도 넘게 찾아드는가 말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여행을 좀 다녀오기로 했다. 여행을 생각하는 순간 진도가 떠올랐다. 내 옆의 그녀는 진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읽던 책을 팽개치고 일어섰다.

“그래요, 가요. 가요. 진도로.”

 

▲ 애끓는 간장이 휘날리는가...

 

내 생애 진도를 여행지로 선택하기는 처음이었다. 그 옆의 완도는 참 많이도 드나들었었다. 완도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작은 행정선이 데려다 주는 보길도가 목적이었다. 아직 청춘이던 시절에, 겨울이면 가끔 보길도가 그리워지곤 했다. 보길도에 뭐가 있나? 별 뚜렷한 죄도 없이 귀양살이 중인 윤선도가 만들었다는 연못과 정자와 동백이 있었다. 그 동백이 겨울이면 꽃을 피워내고 떨어졌다. 핏방울처럼 떨어져 있는 붉은 동백꽃을 하나씩 주워들고, 그리고 주운 그것을 다시 버리고 돌아오는 것 이상의 다른 목적은 없었다.

사실은 작년에도 진도를 가볼까, 하는 생각은 몇 번 했었다. 그 이름도 서글픈 세월호가 우리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끝내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서지는 못했다. 이미 발생해 버린 사태 앞에서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겠지? 하는 패배주의적 사고가 우리의 내부를 관통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수습현장을 열흘도 넘게 쫓아다니며 비통과 침통의 언어를 무수하게 접한 경험이 있는 내 안에 참상에 관한 트라우마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일이면 진도로 간다, 하는 생각으로 잠자리를 펴는 중인데 느닷없이 갯벌 일이 생겼다고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었다. 요즘은 중국산 바지락이 그야말로 밀물 듯이 몰려와서 국산 바지락은 설 자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열흘에 한두 번 정도만 작업을 한다. 진도 여행을 이유로 모처럼 생긴 작업에 불참한다면 업자는 아마 다시는 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눈보라가 참 요란했다. 눈보라 속에서 바지락을 캐느라 손발이 꽁꽁 얼어버린 나는 진도고 뭐고 다 귀찮아져 버렸다.

 

▲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그곳

 

“오늘은 떠나요, 정말로 떠나야 해요.”

나보다 무려 이십 년이나 세상 경험이 적은 그녀는 아직 귀찮음에 익숙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마자 옷을 다 차려입고 팔팔한 목소리로 갑시다, 갑시다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못 들은 척 버티고 자빠져나 있을 만한 강단이 내게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그런 팔팔한 목소리를 나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집을 나섰다.

고창에서 진도는 목포만 지나면 금방이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목포대교를 지나고서도 영암, 해남 등을 조금씩 거치며 한참을 구불구불 더 달린 뒤에서야 진도대교가 나타났다. 진도대교,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인연도 없건만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숙연해지고 있었다. 바람이 심한 날이었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바다의 파도가 괴성을 질러대는 무슨 괴물의 쩍 벌린 아가리처럼 느껴졌다.

진도에 대파가 많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흙보다는 돌이 압도적으로 많은 고장이라는 것 또한 처음 알았다. 돌이 흙보다 많은, 경작을 할 만한 땅이 별로 없는 고장이었다. 작은 산 하나를 넘으면 또 작은 산이 나타나는데 대부분 돌산이었다. 돌산의 언덕배기에 흙이 모여 있으면 그것을 밭이라고 일궈놓고 대파를 심었다. 그래서 대파는 작은 산 하나를 넘으면 나타나고 사라지고 또 나타나기를 되풀이하는데 그 모양이 보기에 참 좋았다. 겨울을 전혀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푸르른 것이 마치 나 살아 있어, 살아 있어, 하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진도의 겨울 대파를 경관농업으로 지정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며 뭔가를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인데 차창 밖으로 전봇대에 매달린 노란 깃발 하나가 나타났다. 나타났다 싶은 순간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잠시 뒤에 다시 나타났다. 노란 깃발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은, 아니 우리의 가슴은 갯벌처럼 무겁고 탁하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 두꺼운 구름을 뚫고 햇살이 비춘다.

 

“잔인무도한 사람들.”

우리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 장면을 회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안전을 지켜달라고 단돈 천 원짜리 한 장도 떼먹지 않고 꼬박꼬박 잘도 세금을 내면서 먹여 살려 온 공무원들에게서 사람의 모습을 보고자 했지만 사람의 얼굴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공무원도 사람인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겠지, 불가항력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이 있었겠지 하는 정도의 이해하고 용서할 마음도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마음마저도 깔아뭉개고 있었다.

모릅니다. 말 안 하겠습니다. 등등 이런 따위 답변은 수사할 권한도 없고 기소할 권한마저도 없는 조사위원들을 조롱하고 능멸하자는 것이지 답변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사람의 나라에서 사람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이 마땅한 일이었다. 무려 사흘 동안이나 컴퓨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들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입은 끝내 자신들이 사람과 괴물의 중간에 위치한 제3의 특수한 계급이라는 식의 궤변이나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희귀한 괴물들을 우리가 그동안 먹여 살려 왔단 말인가. 앞으로도 계속 먹여 살려야 한단 말인가. 대통령은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테러방지법이라는 거, 그것은 개똥밭에 뒹구는 개똥에게 물어봐도 아직은 서서 걷는 괴물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자는 것일 뿐이었다. 만약에 세월호 유가족이나 시민들이 단체로 대정부 항의 같은 것을 한다면, 대통령을 호위하는 괴물들은 즉각 테러단체로 지정하고 매우 합법적으로 잡아갈 것이었다.

미래의 그런 상황이 두려웠던 것인가. 자기들도 공범으로 엮일까봐 염려스러웠던 것인가. 아니면 떠도는 소문 그대로 괴물 그 자체였던 것인가. 이 땅에 그렇게도 많은 방송사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뚜렷하게 차지하고도 남을 청문회 상황을 단 하나도 중계하지 않았다. 오마이뉴스와 팩트티브이라고 하는, 텔레비전 뉴스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도 모르는 인터넷방송이 화질도 나쁜 영상을 겨우겨우 내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긴 법을 만든 국회가 청문회 장소 하나도 내주지 않는 판이니 어련할까마는.

 

▲ 이정표 역할을 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한탄도 이제는 사치로 인식되는 시절이었다. 우리는 입을 꾹 다물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대파 밭이나 신기하다는 투로 응시하며 오밀조밀한 산길을 달렸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길은 좁아지고 바람은 거세어져 갔다. 팽목항으로 널리 알려진 진도항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금방 윗옷이라도 벗겨갈 듯이 대차고 매서웠다. 하늘에서는 두터운 구름을 뚫고 햇살이 바닷물에 자맥질이라도 할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서면 작은 마을 하나가 나오고, 마을을 돌아서 조금 가면 이층짜리 여객선 대합실이 있는, 대합실에서 왼쪽 방향으로 그 유명한 진도 관제소가 보이는, 항구랄 것도 없는 작은 항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우리는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걸었다. 시간은 금방금방 흘러가 버렸다. 어디를 어떻게 걸으며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방파제의 노란 리본들이 기억을 온통 꽉 채우고 있었다.

밤이 되어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언뜻 비치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텔레비전을 없애버린 뒤로 우리는 텔레비전 뉴스에 영 서툴렀다. 오랜만에 접하는 텔레비전 뉴스는 마치 칠십 년대의 극장에서 대한뉴스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신선해서 우리는 잠자리를 찾아든 뒤에도 텔레비전을 켜보았다. 툭하면 나타나서 내 꿈자리를 어지럽혀 온 그 섬뜩한 눈동자가, 그 원한에 사무친 눈매가, 이글이글한 증오로 금방 찢어들 듯이 날카로운 그 눈초리가 한순간 화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니, 그 빌어먹을 놈의 눈초리가 이 사람 것이었어?”

나는 놀랐다. 정말로 놀랐다. 대통령의 눈초리 하나 올곧게 기억을 못 하고 어디서 본 듯한데, 본 듯한데, 그런 생각이나 되풀이하며 고개를 갸웃거려 온 내 자신의 무지와 무식이 부끄럽기도 했다. 어쨌든 나를 괴롭혀 온 의혹 하나가 그날 해소되었다. 우리의 대통령이 그렇게도 무섭게 섬뜩한 눈매를 가졌다는 사실이 나는 새삼 놀라웠고, 그리고 신기했다.

 

▲ 진도에는 대파가 많다.

 

그날 밤 텔레비전 뉴스에서 우리의 대통령은 말씀하시고 계셨다. 나올 때와 들어갈 때가 한결같은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을 뽑아줘야 한다고 마치 새로운 철학을 완성한 학자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화면을 째려보며 말씀하고 계셨다. 그 말씀이 참 신기해서 나는 한참을 새기고 또 새겨보았다. 그리고 혼자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무릇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몰라야 하느니.”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모텔 방을 빠져 나왔다. 잠도 오지 않고, 방에서는 할 일도 없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전날의 매서운 바람과는 영 다른 쾌청한 공기가 진도 전역을 훈훈하게 감싸 돌고 있었다. 요즘 베트남에서는 한국 군인들이 자행한 온갖 행위를 잊지 말고 똑똑히 기억하자는 내용을 담은 증오의 비가 속속 세워지고 있다는 얘기가 문득 생각났다.

그래, 관건은 그것이다. 잊지 않는 것. 똑똑히 기억하는 것. 야만을 야만으로 대응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바위는 물을 잠시 흩어놓을 뿐이지만, 물은 기어이 바위에 구멍을 뚫기 마련이다. 내가 만일 생각 있는 여행기획자라면 진도 투어를 기획하겠다. 그리고 내가 만일 생각 있는 교장선생님이라면 진도항을 수학여행지로 선정하겠다. 또한 내가 만일 생각이 깊은 청년이라면 여자친구를 진도항 방파제에 데려가서 프로포즈를 하겠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곳은, 그곳은 생명을 깨워놓는 영혼들이 춤을 추고 있으니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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