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양이, 그 위대한 발견의 순간들


이제 다 끝났다. 더 이상의 기다림은 무의미하다. 상황은 매우 투명하게 드러났다. 어미 고양이는 사라졌고, 젖먹이 새끼들은 남아서 아우성을 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젖먹이가 한 마리도 아니고 네 마리씩이나 먹이를 달라고 몸부림을 치는 명백한 현실 앞에서 ‘왜’라거나 ‘누가’라거나 따위 질문과 의문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누가 우연히 내 집 앞을 지나다가 어미 고양이를 발견하고 포획해 갔건, 어디의 무슨 건강원에 팔아넘길 목적으로 잡아갔건, 새끼들의 고픈 배를 채워줘야 하는 당면과제 앞에서 그런 것들은 한낱 관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해는 지고, 땅거미마저 사라져 갔다. 바구니에 담아 놓은 새끼들의 아우성 소리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깔딱, 깔딱, 그렇게 겨우 숨이나 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미의 젖을 빨아본 게 언제였던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열두 시간은 족히 지났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멍청하다. 어미가 안 보이기 시작한 지 한 다섯 시간쯤 뒤에 어미를 포기하고 뭔가 먹을 것을 챙겼더라면 새끼들이 이렇게까지 빈사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다 놓은 우유가 집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행인 것은 프린터 잉크 리필을 할 때 쓰는 주사기가 집에 있었다는 점이다. 잉크가 말라붙어 있긴 했지만 끓는 물에 서너 번 씻어내면 소독은 제대로 될 것이었다. 날카로운 바늘은 빼버리고 피스톤 기능만 활용하면 쪽쪽 빠는 능력밖에 없는 새끼들이 우유를 제대로 빨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오밤중에 불을 켜고 젖을 먹이는 중이다.

 

소년 시절 젖먹이 동생을 등에 업고 다니며 구슬치기 같은 놀이를 해야 했던 나는 배가 고파서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가장 쉬운 방식으로는 손가락 하나를 입안에 넣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손가락을 쪽쪽 빤다. 손가락 속임수의 시효가 다 됐을 때는 혀를 넣어주는 것이고, 혀의 속임수도 시효가 다 됐다 싶을 때는 입안에 절반쯤 물을 머금은 상태에서 아이와 긴밀하게 마치 비행기가 공중급유를 하듯이 입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내 입안에 들어 있는 물을 맛나게 쪽쪽 빨아먹는다.

이 세상 모든 포유동물 어린 것들은 배가 고프다고 울부짖는 것 외에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지만, 쪽쪽 빨아대는 기술 하나만은 굉장하다는 것을 나는 아마 그렇게 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입에 닿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일단 쪽쪽 빨아대고 보는 포유동물 어린 것들의 빠는 힘이야말로 어쩌면 존재의 제1법칙이라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유를 팔팔 끓여서 식힌 다음 주사기에 넣고 피스톤 기능을 살짝 가동시켜서 밀어 넣어주면, 그러면 새끼는 익숙하게 쪽쪽 빨아댈 것이 틀림없다는 믿음이 내게 있었다는 얘기이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예견은커녕 상상도 못했었다. 입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건 빨아대는 어린 것들의 그 무차별적으로 강력한 빠는 힘이 다른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 드디어 눈을 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새끼 고양이 네 마리 중 세 마리가 암컷이고 수컷은 한 마리뿐이었다. 그런데 암컷 세 마리가 수컷의 생식기를 어미의 젖꼭지로 오인하고 기회만 있으면 파고들어서 빨아댄다. 처음부터 우리가 그런 현상을 발견했다면 아마 적절한 예방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보면서도 못 보고 있었다고나 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아직 녀석들의 암수 구별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전혀 관심을 두지 못했다. 새끼 세 마리가 한 마리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빨아댄다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얘들이 왜 이러나, 하는 마음으로 살피고 또 살피다가 겨우 알아낸 것일 뿐이었다. 아직 쌀 한 톨 정도의 크기도 안 되는 녀석들의 생식기를 발견해서 암수 구별을 해낸다는 것도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관심사는 녀석들의 생식기가 아니라 목숨 즉 이것들을 과연 우리가 살려낼 수 있느냐 하는 데로만 쏠려 있었다. 새끼 고양이들이 사람 위주로 가공된 우유를 거부감 없이 먹어주느냐의 여부, 먹었으면 제대로 소화를 시키느냐의 여부에 우리의 관심은 집중돼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사람 젖도 안 먹여본, 그 방면으로는 완전히 신출내기들이었다. 사람 젖도 안 먹여본 그녀와 내가 고양이에게 우유를 그것도 주사기에 넣어서 먹이고자 하니 시행착오가 한둘이 아니던 것이다.

그녀는 물론 사람 위주로 가공된 우유와 주사기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안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고양이 분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고양이 전용 젖꼭지가 있다는 것 또한 알아내서 즉각 주문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남자와 여자의 극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이른바 깨달음 같은 것을 얻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의 본격적인 고난은 시작되었다.

 

▲ 딱 마주쳤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의 고난은 아니었다. 그녀의 고난이었다. 새끼 고양이들을 감당하기 전까지의 그녀는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하면 여간해서 일어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누가 찾아와서 부르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는 식으로 나를 깨웠고, 내가 새벽 시간에 갯벌 일을 나갈 목적으로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부산을 떨어댈라치면 어쩌다 가끔 한 번씩은 “벌써 시간 됐어요?”하고 아는 체를 하면서 일어나기는 하지만 대체로는 너 알아서 무엇이든 먹든 말든 적당히 처리하고 얼른 출근이나 해라 하는 식으로 일관되게 꾸준히 당당하게 누워있어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새끼 고양이를 옆에 두면서부터 엄청나게 예민해졌고, 엄청나게 부지런해져 버렸다. 밤에 자다가도 새끼 고양이들의 칭얼대는 소리가 들리면 그녀는 자동인형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벌떡 일어나는 소리에 나도 또한 일어나서 잠에 취한 눈으로, 이게 뭔 황당한 일이냐 하는 심사로 그녀의 민첩한 손놀림을 지켜보는 날이 하루를 지나 이틀, 사흘, 기약 없이 계속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첫날은 우유만 먹고도 서너 시간씩이나 잘 잤다. 그런데 이틀째부터는 무시로 칭얼거린다. 주문한 고양이 전용 분유가 도착해서 그것을 먹였는데도 새끼들은 마치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듯이 십 분도 안 돼서 다시 칭얼거린다. 칭얼거릴 뿐만 아니라 아예 단식까지 해버리고 있었다. 젖꼭지를 아무리 물려도 빨지 않고, 고개를 회회 저어서 뿌리쳐 버리고는 또 다시 칭얼대는데 그 소리가 점점 높아져서 나중에는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단말마의 비명 같은 처절한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냐?

 

▲ 저마다의 취향으로...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두려움이 우리의 머릿속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방안을 가득 채운 공기에 섞인 채로 우리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녀는 단 이틀 만에 파김치 꼴이 되고 말았다. 잠이 들 만하면 깨고, 또 깨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녀의 눈과 볼은 홀쭉, 옴싹 들어가고 버리고 피부는 거칠어져 갔다.

“우리는 혹시 새끼를 키워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격 없는 자가 자격 있는 것처럼 행세할 때 나타나는 오류 내지는 부작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가 하면 저주라는 단어가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저주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 하지만 그 말을 차마 입에 올리지는 못한 채로 우리는 그저 우왕좌왕 허둥거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그날이 왔다. 새끼 고양이들의 어미 노릇을 하겠다고 나선 지 사흘째, 그날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겨우 새끼 고양이들이 생식기와 배변기를 함께 갖춘 포유동물이라는 발견에 이르렀다. 어쩌다가 그녀의 손가락이 거기에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고양이 분유를 아무리 입에 대줘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회회 내둘러대며 칭얼대는 소리만 내는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어르던 그녀가 문득 따뜻한 액체를 손가락에 느꼈다. 이게 뭐냐? 오, 그것은 오줌이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얘들이 한 번도 이게 없었네?”

그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어미 고양이가 사라진 뒤에 새끼들은 빈사 상태를 헤매다가 우유를 먹었고, 고양이 분유를 먹기만 했을 뿐 먹은 것을 소화시켜 사용한 뒤의 노폐물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새끼 고양이들의 입에 젖꼭지를 물리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을 뿐 배설이 필요한 동물이라는 데는 도무지 생각이 닿지를 못하고 있었다.

 

▲ 자다 보니 어떻게 이런 자세가...

 

그런데 그녀의 손가락이 거기에 닿는 순간 오줌이 벌벌 나오고, 야 이거 신기하네, 하는 생각으로 살살 긁어주니 오줌뿐만 아니라 더 큰 것도 나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고양이 어미가 새끼들의 사타구니를 틈만 나면 핥아주는 이유가 배설물을 먹기 위함이 아니라 나오게 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고양이 어미가 새끼들의 배설물을 핥아먹는 것은 그 다음 일이었던 것이다. 먼저 핥아서 나오게 하고, 그 뒤에 먹어서 치운다. 이런 순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통 모르는 채로 있다가 그날 우연히, 문득 그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물론 새끼 고양이들이 사람 잠도 못 자게 칭얼대지 않았다면 그것조차도 발견을 못 했겠지만 말이다.

“아, 그렇구나. 얘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오줌 하나도 싸지를 못하는구나.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암튼 사람하고는 영 다르네?”

아, 이런 발견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니. 오줌이 마려운데도 쌀 수 없을 때의 고통을 경험한 바 있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손가락으로 살살 건드려주면 오줌을 벌벌 싸고, 그리고는 고양이 분유를 먹고 잠들었다가 깨기를 되풀이하는 새끼 고양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행복을 노래할 일만 남은 것 같다고.

실제로 새끼들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뜬 것들이 좌로 우로, 앞으로 뒤로 사방팔방 그야말로 제멋대로들 불불불 기어 다니다가 장애물에 부딪히면 뒤로 발랑 넘어지는데 그 꼴이 볼 만 했다. 중심이 안 잡혀서 다리 네 개를 허공에 대고 마구 휘저어대며 낑낑 소리를 내다가 우연히 어떻게 발딱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손뼉을 치는 그녀 또한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이런 행복을 내가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내가 참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니 나도 당연히 뿌듯하게 행복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행복감은 성질이 영 달랐다.

“그대, 애들 오줌 좀 뉘여요, 응?”

그랬다. 그녀는 이제 틈만 나면 나에게 그 일을 지시했다. 먹이는 일은 내가 영 서툴다고 못 하게 하고 자기가 하면서, 싸는 일은 내게 맡기고 있었다. 어떤 때는 애교가 살짝 깔린 목소리로 부탁을 하듯이, 다른 어떤 때는 엄격한 지휘자의 목소리로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듯이 새끼 고양이들의 똥오줌 가리기를 시키는데 글쎄 이게 뭐랄까, 언제 무엇이 계기가 되어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나는 바야흐로 배설 담당이 돼 있어 버린 것이었다.

 

▲ 살살 건드려주면 나오는 애기똥풀

 

처음 몇 번은 뭐 그런대로 괜찮았다. 심지어는 어미 고양이가 하듯이 그렇게 혀로 살살 핥아서 오줌도 누게 하고 똥도 누게 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 하고 손가락을 최대한 부드럽고 촉촉하게 해서 간지럼을 태우듯이 살살 긁어주는데 그러면 오줌이 마치 아주 작은 장난감 분수처럼 쏙쏙, 솟구쳐 나온다. 그리고 가끔은 뿍, 뿍, 소리와 함께 항문에서도 애기똥풀처럼 노오란 것들이 삐질삐질 삐져나온다.

“아이구야. 생명이란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

내 입이 절로 열리면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온 게 몇 번이었던가. 말로는 도무지 다할 수 없는 어떤 경이로운 성취감 같은 것이 나를 그렇게 감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식의 경이로움이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지속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람의 느낌이나 깨달음이란 것은 아무래도 지속성이 떨어지게끔 돼 있는 것인지 나는 차츰 고약한 냄새를 느끼고 있었고, 손가락에 닿은 물렁하게 끈적거리는 느낌 또한 징그러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 입에서는 절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나 안 해. 더 이상은 안 해.”

그렇게 제법 결기 있는 목소리로 짜증을 내보는 것이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인가. 냄새가 기분 나쁘다고 안 하고, 느낌이 안 좋다고 안 할 수 있다면, 그걸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지금까지 사람으로 살아 왔고, 현재도 사람으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그 일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