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태국에서 살아보기, 사랑하기-15회

 

 

람빵 출장을 가다

저번 노래 부르기 대회 예선에서 본선 진출을 할 수 있게 된 아이 셋을 데리고 두 달 가까이 대회 준비를 하게 되었다. 태국에서는 전국 고등학생들이 모두 모여 경연대회를 치르게 되는데, 종목 수도 많고 대회의 규모도 상당해서 어느 대학 캠퍼스를 일주일간 빌려 이루어진다. 본선은 북부, 남부, 서부, 중부 이런 식으로 지역을 또 나누어서 치러지며, 결선만 수도인 방콕에서 열리게 된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북부 본선에 나가게 되어서 클로드 선생과 중국어 종목의 션루 선생, 그 외 태국 현지 선생님 세 분과 ‘람빵’이라는 도시로 출장을 가기로 했다. 람빵은 관광지로 유명한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의 사이에 있는 도시로, 내가 사는 곳보다는 훨씬 규모가 큰 도시이다. 그러다보니 누구보다도 아이들이 더욱 들떴다. 어디 큰 쇼핑몰에 들르고 싶다는 둥 실컷 신나서 떠들어대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 대회가 치러질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국왕이 서거한 이후, 전국에 추도 기간이 선포되면서 사실 대회도 없어지느니 마느니 여러 소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교감 선생께서 많이 신경을 써주신 덕에 아이들이 대회도 나갈 수 있게 되었고,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람빵에 출장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허락이 쉽게 떨어진 것은 아니다. 자유 여행을 하는 몸도 아니고, 어디를 이동할 때마다 보고를 해야 하다 보니 당연히 출장에 관해 제약이 걸렸다. 내가 몸담는 학교에서야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던 선생이 따라 갔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지만, 이해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나를 파견한 기관의 본부, 또는 그곳의 관계자와도 이야기가 충분히 되어야만 허가라는 것을 받아 비로소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안전상의 문제와 같은 이해가 관련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꽤나 불편한 절차였다. 이 절차의 문제로 아이들이 내가 사는 곳에서 30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읍내에서 예선을 치를 때도 선생이 되어서 얼굴을 비추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읍내보다도 더 먼 곳으로 아이들을 데려가겠다는 나는 틀림없는 골칫덩어리였을 것이다.

본선이 있기 2주 정도 전, 학교에 행사가 있어 본부의 담당자가 우리 마을로 올라왔다. 행사가 끝난 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람빵 출장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출장에 있어서의 안전 문제라던가 결재를 받는 문제 등등 번거로운 것들이 이야기 되었지만, 담당자의 의심 가득한 물음 한 마디가 결국 나를 건드렸다. 꼭 이 출장이 필요한 것이냐는 물음. 학교에는 다른 수업도 많고 다른 일도 많을 텐데 굳이 멀리 출장을 가야겠느냐는 물음. 그래서 나는 가슴에 불이 붙어버린 듯이 조급하게 대답했던 것 같다. 이 대회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아이들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는, 결국 가야겠다고.

 

 

보통 고등학생의 대회라고 하면 별 보잘 것 없는 행사 정도로 비춰질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태국에서 이 대회는 단순히 아이들의 노래 부르기 대회인 것이 아니라, 전국의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수학, 과학, 컴퓨터, 중국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성과를 인정받게 하려는 하나의 창구다. 나는 물론 이런 경쟁 구도의 대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이들에게 이 대회는 몇 번 오지 않는 귀중한 기회다. 대회 결선까지 가서 상을 받기만 하면, 금전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다양한 진학과 진로의 길이 열린다. 선생으로서 내가 이런 대회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했는가. 그리고 선생이 되었다는 마음으로, 내가 아이들에게 함께 해줄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점에 얼마나 기뻤던가. 담당자의 물음을 들었을 때, 그런 마음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어 격하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선생이 되어서 그런 것에 격할 줄도 모르면 무슨 소용일까.

무엇보다 슬픈 것은, 내가 출장을 가기로 결정이 되기 직전까지 아이들이 내게 같이 가느냐고 몇 번씩 물어보더라도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말해줄 수 있다. 가자. 같이 가자. 선생님과 함께 가자. 생활비를 아껴 모아둔 돈에서 지폐 무더기를 집어 챙겼다. 출장비를 기관에서 지원해주지 못해도 괜찮다. 너희들이 무얼 사달라고 아무리 칭얼거려도 괜찮다. 가는 길이 멀고 험한데다가, 덜컹거리는 봉고차에서 열 몇 시간을 달려도 선생님은 괜찮다.

내겐 다 괜찮으니, 아이들아, 이제 함께 가자. 너희의 꿈이 있을 곳으로 함께 가자.

 

 

기도는 단 하나

영토의 대부분이 평지인 태국은 북부지방으로 한참 올라가야만 산지를 볼 수가 있다. 람빵이 위치해 있는 곳 역시 높은 산지였는데, 그러다보니 봉고차를 타고 열 시간이 넘도록 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낭떠러지라 위태로운 이차선 도로에서 맞은편으로부터 오는 거대한 트레일러들을 몇 대씩 보내며 여러 고개들을 넘자, 어느 순간 커다란 도시를 내가 탄 차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설레는 눈빛과 순간 고요해지는 차 안. 드디어 긴장이 감도는 순간이 와버렸다. 큰 대회인 만큼 아이들 역시 설렘과 동시에 막연한 긴장감, 두려움 따위를 품고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어떤 말로도 토닥일 수 없는, 그저 즐겨내야 하는 순간이다.

차가 멈춰선 곳은 동료 선생의 친구 집이었다. 그 친구 분 역시 다른 학교에서 대회를 지도하는 선생이셨는데, 우리 학교에서 람빵에 숙소를 잡지 못해 본인 집에 머물게 배려를 해주신 것이었다. 물론 집이 좁고 많이 불편했지만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된 것은, 남녀 간의 내외가 심한 이 땅에서, 나와 클로드 선생이 여자 선생들, 여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기에는 너무 비좁은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당사자인 나와 클로드 선생은 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다른 선생들 간에는 큰 고민거리였나 보다. 얼마간 친구 분께서 주변을 알아보시더니, 다른 집에서 우리 둘을 따로 초대해주어 그곳에서 묵기로 했다.

 

 

대충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고 나서, 근처의 큰 사원을 선생들과 다 같이 갔다. 어느 곳을 가든 그 곳의 가장 큰 사원을 꼭 방문하는 태국 사람들의 의례에 나 역시 빠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도착하고 나니 꼭 성 같은 모양의 거대한 사원이 눈에 띠었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있었다. 찬란한 태국 역사와 문화가 온갖 화려한 장식들과 문양들에 깃들어 있는 사원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잠깐 고민해보았다. 아무래도 본인의 안위와 가족의 행복, 부와 명예 등 다양한 기도들이 오고 가겠지. 사원 중앙에서 향이 피어오른다. 같이 온 아이들이 커다란 탑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한다.

내게는 기도란 단 하나. 다음 날에 있을 대회에서 내가 내 몫을 하고, 아이들이 제 몫을 하는 것. 기도란 것은 소박할수록, 신도 들어줄 마음이 생기는 것만 같더라. 그러니 결과야 어떻게 되던,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 잘 모르겠어서, 행복에 대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는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신에게, 다른 땅에서 온 인간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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