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태국에서 살아보기, 사랑하기-17회


타지에서 맞는 새해

콴 선생이 새해를 맞이하여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 내가 있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었는데 자동차로 약 사십분 정도는 가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새해를 맞아 일가친척들을 모두 모아 잔치를 연다는 것이었다.

도착해보니 이미 빌려놓은 별장에서는 식재료들을 옮기고 있고 잔치 준비에 한창이다. 나중에 저녁에서부터 잔치는 시작될 것이니 그 전에 자전거를 타고 오자고 콴 선생이 제안한다. 콴 선생 가족들은 전부 자전거를 즐겨 타는데다가, 콴 선생의 오빠는 사이클 아마추어 선수여서 집에 들여놓은 자전거가 여럿이다. 오빠가 몇 번 기어를 만지작거리면 고장 난 자전거들도 금방 살아난다. 그렇게 각자 자전거를 끌고 긴 행렬을 만들어 출발했다. 목표는 마을 너머 산봉우리까지다.

 

 

한참 자전거를 달리다보니 그제야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간 차를 타고 지나다니면서 보지 못한 풍경들이 얼마나 익숙하면서도 낯설 수밖에 없는지. 넓게 드리워진 논밭이 지평선까지 메우고 있고, 나무와 수풀들 너머에는 꽃밭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다. 멀리 산봉우리는 독특하게 솟아오른 모양으로 양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벌과 나비가 귓가를 스친다.

내가 살던 땅은 한 겨울일 이맘때에도, 아직 꽃이 피고 나무가 녹음을 자랑하는 계절. 아직 이 한 계절도 다 살아보지 못한 것만 같은데 벌써 새해가 다가왔다. 낯선 땅에서 맞이하는 새해라니. 더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만 싶다. 더 빨리 이 땅 위에서 달려보고 싶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에서의 생활, 나는 더 많은 것이 보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제야 평범해진 모든 것들이 다시 새로워지고 낯설어진다.

 

 

페달을 멈춘 곳은 산봉우리 바로 밑의 조그만 사찰이었다. 산을 따라 계단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곳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숨을 돌렸다. 달려온 길을 돌아보니 다시 보였다. 떠나온 지점은 육안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달려왔다. 지평선 자락에 보이지도 않는 점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내가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내가 살아오던 땅 역시도 그렇다. 지금은 보이지도 않는 곳에 내가 살던 땅이 머물러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미 이렇게 많이 와있는데 나는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담아놓지 않으면 결국 사라져버릴 추억으로 이곳은 이곳 나름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제 끝이 보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눈앞에 보이니 더욱 마음이 그렇다.

다시 자전거를 끌고 잔치가 열리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별장에선 음식 냄새가 한창이다. 자전거를 세우자 콴 선생 친척 분들이 반기며 먹을 것을 건네준다. 소시지와 어묵, 햄 등을 가득 끼워놓고 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는다. 닭튀김도 있고 구이도 있다. 한 상 차려지니 진수성찬이다. 사람들이 테이블 여럿에 돌아앉아가며 술과 음식을 즐긴다. 새해에는 꼭 이렇게 많은 친척들이 다들 모여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워낙 가족이 커서 이런 날 아니면 전부 모이기도 힘들다고. 그들은 각자 가져온 선물들을 잔칫상 맨 앞에 세워둔다. 추첨을 해서 가족들끼리 나누어가질 선물들이라고 한다. 나도 사가지고 온 선물을 그 틈에 끼워 넣었다. 오늘만은 적어도 이 가족의 일원이다. 이 가족이 되어 새해를 맞는 것이다.

 

 

완전히 깜깜한 밤이 되자 잔치는 한껏 떠들썩해진다. 노래를 크게 틀고 여러 사람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다가 선물 추첨식을 진행하겠다고 한다. 선물을 받아갈 때에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서 받아가야 한다고 한다. 현란한 춤을 춰가면서 선물을 하나씩 하나씩 번갈아 교환한다. 나 역시 선물을 받아가려면 춤을 춰야 한다기에 술에 취한 듯 마구잡이로 춤을 췄다. 내 춤에 별장 안의 개들이 모두 놀라 도망가고, 신이 난 사람들이 모두 무대 앞으로 뛰어 나와 춤을 춘다. 내친김에 노래도 신나게 부르고 땀이 나도록 열심히 놀았다. 꼭 동네에서 돼지 한 마리 잡고 벌이는 잔치인 것 같이 농촌 냄새 가득한 이 시간을 그것도 새해에 가져보기는 처음인데다가 앞으로도 잘 없을 일 아닌가. 무엇보다도 기쁜 새해를 맞이하려면 이곳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되어야 한다. 동네 사람을 넘어선, 정말 가족으로서의 잔치와 새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타지에서 맞는 첫 새해는 카운트다운을 모두 마치고서야 풍등을 올리며 마무리되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밝게 빛나는 풍등들이 하나 둘씩 하늘 깊은 곳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나는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할지 고민했다. 소원을 빌기에는 이 땅에서 이미 많은 소원들이 이루어졌다. 그보단 내가 저 풍등처럼 멀리 떠나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훔쳐진다. 정말 많은 소원을 이룬 이 땅, 이제야 낯설지 않은 나의 땅을 나는 다시 떠나가야만 한다.

살아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고 있다. 이곳 이 사람들을 가족으로 사랑하고 마을 사람으로 사랑하고. 풍등처럼 밝게 불타며 아직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새해 아침의 풍경

새해 아침이 밝자 기다렸다는 듯이 새가 지저귄다. 의사인 콴 선생의 조카 개인 병원에 딸려있는 방에서 잠을 자고 콴 선생네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이 한 상 차려져서 비몽사몽인 내 앞으로 나온다. 전형적인 가정식이다. 태국식 계란 프라이인 카이텃과 생선조림, 삭힌 생선 절임과 다진 돼지고기로 만든 팟끄라파오무쌉, 돼지껍데기를 튀긴 튀김까지. 밥그릇을 비우고 나니 한 그릇 더 줄까 하고 묻는다. 항상 이곳 사람들은 내가 식사를 마치는 것을 보기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음식을 더 가지고 와서 더 먹어라, 조금만 더, 닛너이, 익 닛너이 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애써 거절할 수가 있을까. 또 금세 채워진 한 그릇의 밥을 비워낸다. 그제야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 이곳 사람들.

 

 

아침을 먹고 집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새해를 맞이하여 콴 선생의 가족들이 모여 있다. 부모는 의자에 앉아 있고, 자식들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있다. 가족들은 모여서 새해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부모는 자식에게 덕담을 하고 축복을 기원한다. 어느 땅에 사는 누구든 새해라는 것은 이처럼 행복을 기원하는 순간인가보다. 경건하게 부모에게 절을 하는 자식들을 보며 가족들의 따뜻함을 느낀다. 여느 때보다도 더 끈끈해지는 사랑이다.

세워져 있는 자전거를 몰래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누구 집 앞에 조그만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부둥켜 있다. 색도 서로 다른 고양이 두 마리, 평온하게 집 앞 길가로 하품을 내뱉는다.

새해 아침, 햇살은 더욱 따스하다. 아름다울 것은 더욱 아름답고, 사랑할 것은 더욱 사랑스럽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