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태국에서 살아보기, 사랑하기-18회

 

마지막으로 떠나는 여행

새해가 지나고 앤 교감 선생님이 귀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녀오지 않겠냐고 제의를 하셨다. 이를 거절할리 없는 나인지라 당연히 가겠다고 했다. 여행을 가기로 한 날 이른 아침부터 앤 선생님의 차가 나와 동료 선생들을 데리러 왔다. 우리가 사는 마을에서 한두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펫차분’이 목적지다. 그리 멀지도 않고 북부 산악 지대의 시작점이라 서늘한 날씨에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클로드 선생도 여행에 합류했다. 클로드 선생과 앤 선생님, 앤 선생님의 친척 두 분, 롱차야펀 교감 선생님 부부, 나와 동료 선생 다섯이라는 꽤 많은 인원이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여행이 되는 것이다.

한참동안 좁은 차 안에서 엉겨 붙어 이동했다. 서로의 머리를 맞대면서 얼마간 잠들었을까, 눈을 뜨고 보니 내가 머물던 마을에선 볼 수조차 없는 산등성이 한복판에 차가 올라서 있었다.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한 잔 사고 다시 출발. 열심히 달려온 곳은 큰 불교 사원이 있는 곳이었다. 새해 이맘때만 되면 사람들로 붐벼서 발 디딜 틈 없다고 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에 내려서 불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붐비는 사람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불상이나 사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자기 신발을 놓았음에도 잃어버리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클로드 선생은 오래 태국에 머물렀음에도 신발을 벗는 문화를 익숙하지 않아 나와 다른 동료 선생들만 들어갔다.

 

 

흰 색의 거대한 불상 앞에는 촘촘히 색깔 별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새해에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서 소원을 빈다고 했다. 같이 온 선생들도 소원을 비는 모양이었다. 무슨 소원을 비느냐고 물어보자 모두 가족을 위한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도 가족이 우선이 되는 이곳 사람들의 마음이 엿보였다. 가족이 있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존재 역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곳 사람들. 늘 같이 사는 사람, 같이 생활하고 같이 다니며, 일하고, 자라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그 관계에 자신 역시 존재한다고 믿는다. 촘촘히 박혀 있는 보석들의 색깔이 자신이라면 그 위에는 커다란 부처가 계신다. 즉 우리들의 색깔은 그 모두가 하나였음에서 비롯된다는 그들의 오랜 사고방식이다.

그러다보니 새해가 되어 더욱이 이들의 불교 예식은 끊이질 않고, 온통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러 온 모양새다. 이곳에 이방인이 덩그러니 놓여있자니 언제나 이런 상황이 낯설 뿐이다. 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서 그 가족들의 틈새바구니에 끼어 나름 눈을 감고 생각을 해본다. 이제 떠나 가야할 때가 정말 다가와 버렸구나. 여섯 달을 머물며 단 한 순간도 이런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세월에 그 겹겹이 쌓인 시간들이 흘러갈까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 다 흘러가버리고 홑겹만이 남았다. 이들과 이렇게 함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날도 이젠 정말 얼마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은 두 눈이 떨려온다. 뜨거운 눈물이 슬쩍 흐른다.

 

 

사원을 내려오고 정원을 둘러보고 나서는, 클로드 선생과 둘이 산을 오르기로 했다. 이 땅에 와서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산행인데 처음으로 클로드 선생과 오르는 것이다. 다른 선생들은 나이도 있고 해서 같이 올라가지는 않았다. 한참을 클로드 선생 뒤를 좇아 오르다가 꽤나 만만찮은 산행이라는 것을 그제야 눈치 챘다. 숨이 가빠오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길이 진흙이라 미끄럽기도 했고 지나가는 곳마다 거의 정글처럼 빽빽한 수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수풀 사이로 애써 오른 정상에는 광활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보같이 둘 다 외투를 벗어던지고 올라오느라 휴대전화를 챙기지 못해 사진하나 찍지 못했지만, 펫차분의 모습이 환하게 전부 들여다보이는 정상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꼭 모든 여행이 마무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간 걸어온 모든 걸음들이 지금 들여다보는 광경 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것처럼.

산에서 내려와 폭포를 구경하고, 중국 음식점에서 다 같이 마지막 저녁 식사를 했다. 점점 해가 기울고 깜깜해진다. 여기저기 전등의 불이 들어온다. 운치 있는 밤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접시를 챙겨준다. 이곳저곳에서 더 먹으라는, 이제는 당연한 권유들이 오가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쓸쓸한 마음도 견딜 수 없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밤. 우리는 그간의 추억과 정들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 서로 최선을 다했다. 서로가 아쉬운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하여,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트럭 뒷자리

사람에 비해 차의 공간이 많이 비좁아서 펫차분을 여행하는 동안, 롱차야펀 교감 선생님 트럭의 화물칸에 자주 앉아 갔다. 주로 여자 선생님들이셨기 때문에 나와 클로드 선생, 그리고 젊은 동료 선생들이 자원해서 화물칸에 앉았다. 엉덩이도 배기고 춥기는 또 무척 추운 자리지만 그래도 펫차분 여행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트럭 뒷자리에서의 기억들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트럭 위에서 바람을 마구 즐기며 앉아 있으니 막상 드는 생각은 대학교에서 농활을 갔던 기억들이었다. 그때도 농부 아저씨 트럭 뒤편 화물칸에 앉아 시골의 바람을 한참 즐기곤 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드 선생과는 트럭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바람소리에 목소리가 점점 묻히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대화도 안 될 것 실컷 노래나 부르면서 다니자는 심산이다. 듣는 사람도 없을 테니 목청껏 아는 팝송들을 마구잡이로 불러본다. 비틀즈와 아바, 비지스, 시카고 등 오래된 팝들을 부르면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흔든다. 아바의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를 때는 더 가관이었다. 서로 그 노래의 여주인공이 된 듯이 비련하고 처절하게 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부른다.

 

 

그렇게 실컷 노래 부르며 놀다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모두 기진맥진하여 트럭 화물칸에 셋이 나란히 누웠다. 깜깜한 어둠이 찾아든 트럭, 하늘을 보고 눕자 우수수 떨어질 듯한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손으로 가로등 불빛들을 가려가며 그 별의 개수를 헤었다. 이 땅의 이야기와 내 이야기, 클로드의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며 별들을 구경한다.

가끔은 정말 소박한 것들이 너무나도 큰 추억들을 남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불편할 것만 같은 순간들이 기억으로 남으면 낭만이 되고 추억이 된다. 펫차분에 다시 가고 싶다. 그 쏟아지는 별들을 보러 다시 트럭 뒷자리에 몸을 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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