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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이랑 부직포를 겹겹이 덮어주고..."

<전라도닷컴> 묘량 농사문화재들의 봄맞이-⑤ 전라도닷컴 남인희·남신희 기자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07.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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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을 하래 묵히문 닷새를 해도 못해. 때를 맞촤 일을 해놔야 지 철에 안 바빠.” 이평신 할배.

“심경! 깊이 갈아놔야 뿌리가 잘 뻗는 법이여”

“일을 하래 묵히문 닷새를 해도 못해. 때를 맞촤 일을 해놔야지 철에 안 바빠. 인생사가 다 그래. 다 때가 있는 것이여.”

그 ‘때’라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오늘 밭에 선 이평신(78·운당리 영당마을) 할배. 아마도 ‘근(勤)’이란 유산을 물려받으신게다.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자를 물려 주겠노라고 했던 다산 정약용.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라며 그가 자식들에게 물려준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그러면 부지런함(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일을 저녁때까지 미루지 말라.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늦추어서는 안 된다.”

오늘 이평신 할배가 행한 ‘근(勤)’은 심경(深耕).

“밭을 한번 갈아놨는디 심경허니라고 한번 더 갈았어. 심경이 뭣인고 허니, 밭을 더 깊이 간다는 말이여.”

깊이 갈아두는 이유가 있다.

“곡석은 뿌리가 뻗는 만치 욱으로 자라는 것이여. 욱으로 자란만치를 보문 뿌리 상태도 알 수 있제. 심경해 놔야 뿌리가 잘 뻗는 법이여. 지피 갈아노문 땅도 보드라와지고 땅 지픈 곳까지 양분도 고로고로 가제. 풀도 죽고 해충도 죽고 긍께 약도 더 안하고.”

그 생애 역시 심경의 경지. ‘한 살 형님’인 집과 더불어 당신이 나고자란 땅을 평생 지켜오고 있다.

“울아버지가 우리 집을 짓고 나서 1년 뒤에 나를 났어. 긍께 우리 집은 79살. 나보다 한 살 형님이여.”

틈나는 대로 붓글씨를 쓰는 당신의 방엔 ‘근심엽무(根深葉茂)’란 네 글자 담긴 액자도 걸려 있다.

“뿌리가 지프문 잎싹이 무성하다, 머이든 기초를 짱짱허게 해놔야 한다 그 말이제.”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열댓살부터 지어온 농사다. 농사 이력 60여 년.

“지금도 배울 것이 많애. 미련한 놈 보고 농사나 지어라 이 말은 틀린 말이여. 뭐이든 지대로 할라문 정신을 써서 궁리를 해야 되는 법이여.”

“농토는 거짓말을 안한다”는 믿음으로 버텨온 농부의 한생애.

“땅은 노력한 만치 대가를 돌려줘. 근디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그 대가를 지대로 안 돌려준께 그것이 문제여.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억을 못 몬치고(만지고) 산디, 테레비 뉴스 보문 억을 천이나 백 만치로 이야기해. 그것이 몹쓸 시상이여.”

 

 

▲ “괭이질헐 자리에 삽날을 대서 일이 훨씬 빨라.” 삽괭이.

“천금도 대박은 없고 흘린 땀만큼만”

<‘삽’이라는 한 글자에는 많은 의미와 뉘앙스가 담겨 있다. 파다, 덮다, 뜨다, 퍼담다, 퍼내다 등의 술어를 수반하는 삽질은 자신의 몸을 구부리고 낮춰야 하는 일이다. 한 삽에 한 삽을 더해야 하는 묵묵하고 막막한 일이다. 흙 한 삽, 모래 한 삽, 석탄 한 삽, 시멘트 한 삽이 모여야 밥이 되고 집이 되고 길이 되고 마을이 되고 무덤이 된다. 삽질의 정수(精髓)란 그 우직함과 그 정직함에 있다. 그 정직함을 배반할 때 삽은 무기가 되기도 한다. 농민이든 노동자든, 노동의 본질이 삽질에 있는 것이다.> (정끝별)

파고 덮고 뜨고 퍼담고 퍼내는 그 일을 더불어 하는 일동무.

문연수(78·덕흥리 흥곡마을) 할아버지는 시방 삽 한 자루 들고 논두렁에 섰다. 이제부터 순서없이 달려들 일머리로 추켜든 것이 논두렁에 길을 내는 것.

“해마다 새로 만들아도 풀에 믹혀져. 쫍짱하게나마 새로 내놔야 논두렁에 풀 빌 때 발 딛고 서제.”

춘분을 막 지났으니 “하루를 밭 갈지 않으면 일년 내내 배부르지 못하다”는 농번기가 바야흐로 시작됐다.

삽과 함께 들고 나온 독특한 연장이 있다. 헛개나무 자루에 90도로 달아맨 삽날. 그이가 만든 특별한 연장이다. 삽으로 만든 괭이니 ‘삽괭이’라 할까.

 

▲ “해마다 새로 만들아도 풀에 믹혀져. 쫍짱하게나마 새로 내놔야 논두렁에 풀 빌 때 발 딛고 서제.” 시방 삽 한 자루 들고 논두렁에 선 문연수 할아버지.

 

“괭이질헐 자리에 삽날을 대서 일이 훨씬 빨라. 괭이질 세 번 할 것 한번 할라고, 하하.”

그 리 앞서가며 궁구하며 일하는 여전한 현 역 . 청년실업률 12.3%(2017년 2월 기준)인 나라에서 80대에도 90대에도 정년도 은퇴도 없는, 이름하여 ‘농부’.

“농사일이 수익 많은 일이문 돈 많은 사람들이 돈 더 벌라고 폴쎄 추켜들고 뺏아갔겄제.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천신도 안오제.”

밥상에 밥이 없고 학교에 낼 월사금이 없던 시절을 건너와 여전히 땅을 지키고 있는 사람.

“시방 밥 한 그륵이라도 떳떳하게 먹는 것은 그만치 땀을 흘렸기 때문이제. 도시에서는 일확천금을 꿈꾸지만, 촌에는 천금도 없고 촌에는 대박도 없어. 흘린 땀만큼만 얻는 데여.”

 

 

▲ “모중만 잘 키와도 농사 절반은 지슨 폭이여.” 거기 푸른 기운이 남실댄다.

“모중 돌보대끼 어매 아배한테 하문 효자상 받아”

“아이고 징해 징해. 일이 엄청 많애. 저닉에는 춘께 얼어죽을깨비 이불 덮어주고, 아침밥 묵고 한 야달 시 넘으문 볕 보고잘 크라고 숨도 잘 쉬라고 이불 걷어내고. 날마동 아침으로 저닉으로 문안인사를 드려야써.”고추 모종이 크고 있는 비닐하우스 안, 이정자(74·삼효리 효동마을) 할매가 저녁맞이중이다.

“이거 덮어줘야 하래 일이 끝나.”

신랑각시 신방 차리는 정성이 이만할까. 비닐이랑 부직포를 겹겹이 덮어주고,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되어 폭삭하니 이불까지 덮어준다. 행여 뜰썩일세라 이불 끝자락 따라 묵직한 돌멩이들까지 조르라니 눌러 둔다.

 

▲ “이거 덮어줘야 하래 일이 끝나.” 이정자 할매. 신랑각시 신방 차리는 정성이 이만할까. 비닐이랑 부직포를 겹겹이 덮어주고,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되어 폭삭하니 이불까지 덮어준다.

 

“날 좋을 때는 더 늦게도 덮으고, 오늘은 꾸무럭한께 일찍 덮으고.” 하늘 낯색 살펴가며 쏟는 살뜰한 정성 알아주듯, 그새 많이 컸다. 비닐을 들추면 거기 푸릇한 기운이 남실댄다.

“이 시상 애린 것들은 머이든 이삐고 사랑시롭제. 숭군 지 한달 넘었어. 첨에 올 때는 째깐했제. 잎싸구 두 개만 자름하니 살짝 벌어져 있었어. 고사리손 같이 연하디 연허던 것이 이러코 컸어. 어디 시어 보까. 인자 여섯 잎싸구 났구만. 꼬추 지도 클라고 애를 썼겄제.”

어디 출타라도 할라치면 이웃한테 부탁을 해야 맘을 놓는다.

“어디 맘대로 가도 못해. 까딱 잘못하문 하랫저닉에도 죽어불어. 우리 친정동네서도 어떤 사람이 옆집한테 꼬추 모중을 부탁해 놓고 어디를 갔다 왔는디 그 사람이 깜빡 잊어불고 밤에 냅둬분 통에 다 죽어불었다던만.”

비닐하우스에서 키워서 밭으로 옮겨 심기 전까지 들어가는 공력만 해도 지극하다.

 

▲ 집안의 방마냥 커튼까지 쳐서 야무지게 단속하는 그야말로 ‘하우스’.

 

“모중만 잘 키와도 농사 절반은 지슨 폭이여. 여그서 나갈 때문 꼭 시집보내는 것 같제.” 밭에 옮겨 심는 때는 4월20일께.

“꼬옥 애기 키우대끼 해. 금이야 옥이야 키와. 어매 아배한테 이러코 잘 하문 효자상 받을 것이여.”

야무지게 덮고 단속하는 손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비닐하우스 문 안쪽에다 커튼까지 친 뒤에야 비로소 문을 닫고 나선다. 할매의 봄날 하루가 끝났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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