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 말 지고 장터에 나간 아버지는 잔뜩 술에 취해…
쌀 한 말 지고 장터에 나간 아버지는 잔뜩 술에 취해…
  • 김덕희
  • 승인 2018.01.0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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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머슴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면서 TV에서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깡촌. 그 안에서만 갇혀 지내면서 당직골이 온 세상인줄만 알았던 나에게 그날, 죽산 장터에서 접했던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신기 그 자체였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난 오로지 장날을 기다리는 낙으로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걸쳐 입으시고 집을 나서면 어김없이 아버지 뒤를 따랐다.

장에 가시는 날이면 아버지의 어깨엔 항상 쌀 한말씩이 올려져 있었다. 그 쌀은 아버지가 남의 집 일을 해주고 삯으로 받은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당직골에도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다녔다. 하지만 아버진 거의 대부분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장에 나가셨다. 그 무거운 쌀 보따리를 짊어진 채로…. 그런데도 아버지의 걸음은 무척 빨랐다. 어린 나는 안중에도 없이 아버지는 걸음을 재촉하셨고, 난 거의 뛰다시피 아버지 뒤를 쫓아야했다. 장터까지 가면서도 아버지는 딱 한 번을 쉬셨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산마루 고개가 바로 쉼터였다. 한참을 비탈진 고갯길을 오르면 나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됐고,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고개 위에서 잠시 쌀 보따리를 내려놓고 담배를 태워 물곤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럴 때마다 내 몸은 온통 땀으로 푹 젖어 들었다. 고개 위에서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들판 넘어 산 아래 초가집들이 몇 채 드문드문 모여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당직골이었다.

 

▲ 사진=pixabay.com

 

간신히 한숨을 돌리려 하면 아버지는 바로 다시 쌀보따리를 짊어지시곤 고갯길을 앞장 서 내려가셨다.

거의 한시간 반은 넘게 걸린 뒤에야 죽산장터에 도착하면 아버지는 우선 쌀부터 돈으로 바꾸셨다. 그리고 다음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참견을 하시거나, 막걸리를 드시는 게 일과였다. 난 아버지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 눈에 보이는대로 사주시는 과자들을 먹으며 시장 구경에 빠져들었다. 과자도 과자지만, 당직골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숱한 구경거리들은 어린 나에게 새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주었다.

때론 정신을 놓고 있다가 아버지를 잃어버려 엉엉 울면서 온통 시장 바닥을 뒤지고 다닌 일도 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장터가 문닫을 시간. 장사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사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물밀 듯 빠져나간 시장 골목 한 귀퉁이, 아버지는 잔뜩 술에 취한 채 곯아떨어져 주무시고 계시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질 않으셨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포기. 아버지는 해가 떨어진 깜깜한 밤에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결국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밤서리에 진저리를 치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 때에야 아버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하지만 술이 덜 깬 아버지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시면서 쌀 보따리를 메고 걸어오셨던 길을 한참을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물론 장터에 나올 때와는 달리 아버지는 대부분 빈털터리가 된 상태였다. 쌀을 팔아 바꾼 돈을 술 마시는 데 몽땅 써버리시는 것이었다.

캄캄한 산길을 걸으면서 행여나 산짐승이 나오지 않을까, 행여 옆집 할머니한테 들었던 도깨비가 나타나는 건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도 마음은 뿌듯하기만 했다. 바로 낮에 실컷 구경한 새로운 세상이 준 느낌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입에선 절로 노랫소리가 나왔다. 내가 조그만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어느새 아버지의 입에서도 구성진 가락이 흘러나왔다. 아버진 때로 민요 같은 타령을 부르시기도 했고, 라디오 등을 통해 들어봄직한 트로트 등을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낮에 쉬었던 고갯길을 지나 들판을 지나서 걷다보면 어느새 새벽여명이 밝아오고, 그때서야 아버지와 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당직골은 사실 경기도와 충청도 경계선에 있다. 북쪽으로는 죽산과 장호원, 남쪽으로는 광혜원과 진천, 동쪽으로는 삼성과 음성, 서쪽으로는 안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틈새에 끼인 게 바로 내 고향 당직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기도 죽산에 있는 장터에 가기도 했고, 충청도에 있는 다른 장터에 가기도 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때론 죽산에서 열리는 죽산 5일장에 가셨다가 그 다음날엔 또다른 곳에서 열리는 5일장에 가시기도 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다른 장들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많이도 따라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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