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곰의 부탁
[신간] 곰의 부탁
  • 이주리 기자
  • 승인 2020.11.17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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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민 지음/ 문학동네
ⓒ위클리서울/ 문학동네
ⓒ위클리서울/ 문학동네

[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곰의 부탁』 속 인물들은 청소년, 배달 노동자, 성소수자, 여성, 난민 등으로 불린다. 교차하는 경계 위에 선 이들의 모습에서 ‘나’와 ‘너’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이 소설이 끈질기게 보여 주듯, ‘괜찮지 않음’이란 한없이 고유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가 지나고 있음이 분명한 마음의 상태이므로. 마음속 가장 외지고 구석진 곳에 머무르곤 하는 목소리들, 나조차 듣지 않으려 했던 나의 마음을 듣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형민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마음의 발견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에게,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괜찮음을 부탁’하는 마음에 닿기 위해서일 것이다. 『곰의 부탁』이 청소년소설의 이름을 벗고 양장제본으로 찾아온 이유다.

경쾌한 템포로, 그렇지만 흩날리지는 않고 단정하게 흘러가는 문장들이 일곱 편의 소설을 이룬다. 소설 속 갑갑하고 무거운 상황을 가뿐하고도 무심하게 툭툭 풀어내는 능숙함, 그 사이사이에 위트와 유머를 쉼표처럼 박아 놓는 진형민 특유의 노련함이 응축되어 있다. 덕분에 이 책의 독자는 웃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가끔은 이야기 속 인물과 함께 세상을 향한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 것이며 끝내는 울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곰의 부탁』으로 만나게 될 이들은 “경계 위의, 경계 밖의 청소년”(송현민)이자 “탁한 풍경 속에서 버티며 살고 있던”(송미경) 이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곰의 부탁』은 부조리와 그로 인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느닷없는 폭력의 가능성마저 감내해야 하는 이 세계를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웃기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은 이 이야기의 장르는, 말하자면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곰의 부탁」)인 것이다.

표제작 「곰의 부탁」의 ‘나’는 해를 그릴 때면 빨간색으로 칠해 왔다. 아무 의심 없이 자신 있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해를 한 번도 자세히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벽녘 겨울 바다에 선 ‘나’의 눈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해는, 빨간색이 아니라 “눈부신 노란색”이다.

작가는 바다나 해처럼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함에도 많은 이들이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던 존재들을 각 이야기의 무대 중심에 세웠다. 배달 노동을 하며 “돈 생각 좀 안 하고 살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 “쉬쉬 숨겨야 하는” 사랑을 하는 아이, 예민한 마음으로 콘돔 봉투를 처음 뜯는 아이, 타국의 골목에서 “세상에 없는 듯” 살아가야 하는 아이까지. 이 아이들은 “숨겨야” 하거나 “자꾸자꾸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만 실은 “할 말 없음이 가장 솔직한 내 심정”이라며 설핏 속내를 내비친다. 세상이 지레 넘겨짚거나 심지어 없는 취급을 할지라도, 이들이 눈부신 노란색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더 보탤 말이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이므로. “거기 있음을 아는 것이 나의 시작”이라는 작가의 말에는 누구든 자신의 존재를 해명하거나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람부탄」의 세디게는 머리칼을 가려 주는 히잡을 꼭꼭 여미고, 「12시 5분 전」의 영찬은 가방 속에 숨긴 것을 어른들 앞에선 꺼내지 않는다. 「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날」의 지용은 문에도 마음에도 언제나 자물쇠를 단단하게 걸어 잠그고 다닌다.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 사이를 수시로 오가면서도, 모두 속엣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 이들은 “내가 괜찮은지 아닌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괜찮은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아니면 “자신이 괜찮은지 아닌지 생각할 기운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어디서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몰라 억지로 참고 있을 뿐”이다.

『곰의 부탁』은 긴 터널 같은 계절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말-괜찮냐는 질문이자 괜찮아 달라는 부탁이다. 또한 섣부른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 먼저 “서로의 괜찮음을 물어도 되는 사이”가 되어 옆에 있어 주려 하는 마음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다 이따금씩 조심스럽게 “울어도 괜찮다고, 지금이 그때라고, 자그마한 어깨를 내민다.”(송수연) 이 책을 읽다 문득 ‘내 등짝에 가만히 와 닿는 손바닥 두 개’가 느껴지는 순간, 마음속 문에 걸린 자물쇠는 잠시 풀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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