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지난 가을부터 일주일에 한 번 난타 출강을 하는 곳이 있다. 인근의 한 아파트 경로당이다.

지역의 노인 복지관 소속으로 어르신 대부분이 7,80대 할머니들이시다. 물론 경로당 내부에는 할아버지 방도 있지만 할머니들이 많이 이용하시는 듯 했다. 노인 복지관에서 관리를 하는 시설이어서 출강 섭외를 해 온 사람은 복지관의 사회복지사였다. 어느 날 자신을 사회복지사라고 소개를 하며 내게 난타 출강을 의뢰해 온 것이 벌써 2년 전이었다. 수업시간이며 여러 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합의하고 수업을 나가기로 하였는데 마침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져 버렸다.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들이다 보니 특히 방역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을 것이고 첫 수업을 나가기도 전에 잠정적인 연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담당 사회복지사는 가끔 전화를 걸어 나의 안부를 확인하였지만 혹시 내가 다른 곳으로 출강하게 된 것은 아닌지를 내심 확인하였을 터이다. 처음 경로당 수업 의뢰를 받았을 때는 조금 망설이기도 했다. 내 성격이 그렇게 막 좋은 편이 못 되는지라 엄마에게도 친근한 딸 노릇을 못하고 시어머니께는 더더욱 무심한 며느리인데 생판 모르는 어르신들 앞에서 생글생글 웃어가며 수업을 진행할 자신이 솔직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강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나는 그 약속을 지켜야했고 2년을 기다린 끝에 가을이 시작될 무렵부터 어르신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동작들과 가락으로 구성하고 어르신들의 취향에 맞는 음악으로 선곡하는 등 나름의 준비를 하였다. 그 날도 경로당 수업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곡한 음악을 다시 한 번 들어보고 작품 내용을 확인한 다음 스틱과 블루투스 스피커를 챙기고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컨디션도 괜찮았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보호자님, 여기 요양원인데요,” 라고 시작하는 상대방 목소리는 비교적 침착하고 차분한 말투였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긴박함이 묻어 나왔고 목소리의 떨림은 핸드폰을 들고 있는 내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평소에도 혈압이 조금 높은 편이기는 하였지만 그날따라 혈압 수치는 200을 향해 치달았고 높은 혈압 때문에 왼 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 충혈이 되었으며 어제 저녁부터 식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병원을 모시고 갈 것이니 그리 알고 있으라는 요양원 관계자의 전화는 나를 거의 유체이탈의 상태로 블랙홀에 던져 놓다시피 하였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엄마는 늘 건강하였다. 특별히 앓고 있는 지병도 없었고 그저 겨울철 감기 정도는 한 번씩 지나가기는 하였지만 그 외 다른 신체적인 증상은 없는 편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살았다. 병원은 간판 내걸어 놓은 도둑놈들이라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 오셨으니 나도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몇 해 전 어느 여름 날, 끝도 없이 밀려드는 폭염에 식음을 전폐하고 기력을 소진하였을 때도 절대 병원은 가지 않겠노라며 버티다가 결국은 119의 도움을 받아서 진료를 받아야 했다. 엄마는 건강하다기 보다 그냥 아프지 않는 사람이었다. 혈압이 높은 이유도 어느 부위가 딱히 안 좋아서 높은 게 아니라 그저 연세가 높다보니 자연스러운 노화의 현상 중 일부일 뿐이라고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이 내게는 두려움이었고 뱃속 안의 장기들이 그물사이로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맞이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죽음도 사실 큰 감흥이 없었다. 큰 산과 같은 우람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시집을 와서 보니 시아버지께서도 남편이 어렸을 때 작고하셨다고 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을 아직은 당해 본 적이 없으니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아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전화에 내가 두려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지 엄마의 건강이 걱정되었다기보다 구순을 바라보는 엄마의 연세에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내게 닥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가족의 영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극히 이기적인 내면의 불안은 아니었을까.

몇 년 전 여름, 탈진상태의 엄마를 119의 도움으로 간신히 진료를 받고 요양원에 입소시켜야했던 그 날도 세상이 무너진 듯 목 놓아 통곡을 하긴 했지만 두렵고 불안하지는 않았다. 엄마의 치매정도는 조금씩 심해졌고 내가 모실 수 있는 여력이 안 된다는 원망 가득한 죄책감을 꺼이꺼이 눈물 속에 적셔버리긴 했어도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을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수업을 진행하는데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유체가 이탈이 되는 바람에 블루투스 스피커도 잊어버리고 동작의 순서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어르신들의 시선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우리 엄마는 아파서 누워있다는데 나는 여기서 엄마 또래의 어르신들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북을 치고 상냥한 목소리로 동작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 굉장한 무력감으로 느껴졌다. 면회조차 허락이 안 되는 현실에서 엄마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처럼 말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용납할 수 가 없어서 어르신들께 이실직고를 하고 양해를 구하였더니 감사하게도 어르신들은 마치 당신들의 일인 양 엄마를 걱정해 주었다.

천당과 지옥은 정말 한 끗 차이일까. 그렇게 두렵고 지옥 같았던 마음이 어르신들의 위로에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사과를 좋아하세요. 엄마가 식사를 안 하시면 사과를 좀 깎아서 주세요.”

이틀 동안 요양보호사와 긴박한 통화를 몇 번은 하였다. 병원도 안 가겠다, 식사도 안 하겠다 버티는 엄마와 요양보호사와의 지난한 싸움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영상전화를 하면서 딸아이와 몇 마디 나누던 엄마는 다행히 사과 몇 조각을 시작으로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였다고 했다. 이틀 뒤, 드디어 식사를 하고 혈압 수치도 평균을 회복하였다는 소식에 그동안 지옥을 헤매던 때와 달리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천국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안도감에 또 얼마나 서러운 울음들을 쏟아 내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첫 손주를 유별나게 예뻐하였다. 당신의 딸년은 탐탁치않아 하면서도 그 딸년이 낳은 딸은 그렇게 예쁘다고 하였다. 한 끗 차인데 말이다.

지금은 엄마와 이별할 때가 아님을 확인하고 괜한 다짐을 한다. 참 이기적이다. 엄마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 보다 나를 위해서 엄마하고 헤어지지 않기를 먼저 바란다. 가족의 영면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되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준비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주일 뒤, 경로당 수업을 갔다. 어르신 한 분이 조용히 다가오시더니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엄마의 건강을 물어보신다. 나름 프로 강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던 일주일 전 내 행동이 후회가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어르신들 걱정 끼쳐 드리지 않고 수업을 마무리 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나 두려웠던 나머지 이실직고를 했던 게 부끄러움으로 몰려왔다.

영원한 생명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한정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인간이겠지만 엄마는, 부모는 그냥 있었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고 가끔 내 이름 한 번씩 불러주며 밥 먹었냐고 물어봐주기만 해도 나는 세상 살아갈 힘이 날 것 같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부모가 생존해 있고 아니고의 그 한 끗 차이가 가져오는 존버의 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힘인 것을.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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