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어' 리뷰]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영화 ‘에어' 포스터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때로는 이유 없는 행동이 필요하다

나를 믿을 수 없어 주춤할 때마다 떠올리는 문장이 있다. 저명한 작가가 쓴 회심의 글 같은 건 아니고, 어느 사형수의 말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광고의 슬로건이다. 여기서 눈치챈 이도 있을까. 전혀 감이 오지 않아도 듣고 나면 누구나 무릎을 탁 치고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바로 나이키가 30여 년 동안 줄곧 외쳐온 ‘Just Do it’이다.

참 단순하고 우직하다. 그만큼 확신이 느껴진다. 나이키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했고 나는 주식 한 푼 없지만, 이 문장이 얼마나 좋은지는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광고 또한 점퍼나 신발을 구입하라는 소비 종용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삶을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라이프 스타일 캠페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꼭 운동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자신감이 곤두박질하고 나도 모르게 주저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저스트 두 잇’은 무의식을 뚫고 올라오곤 했다. 에라이, 그냥 하자. 그러면 나는 자신 있게 달려 나가는 광고 속 운동선수가 됐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해내지 않아도 이미 멋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어려운 건 이유 없이 일단 몸을 움직여 행동하는 일이었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댈 필요도, 억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믿을 필요도 없었다. 일단 시작을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해 갔다.

모두가 범고래를 갖고 싶어 했다

사실 내가 가진 나이키 제품은 이전 연인이 사준 운동화 한 켤레와 헌 옷 가게에서 만 원에 산 어느 축구팀과의 콜라보 바람막이뿐이다. 안감이 부드럽고 축구팀의 로고 색이 예쁘다는 게 구매 이유의 전부였다. 삶의 태도와 방식에 빚을 진 것 치고는 참 소박한 컬렉션이다. 슬로건이 마음에 들어봤자, 나는 패션이나 브랜드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 몇 해 전엔 동기들이 자꾸 범고래를 사고 싶다고 말하는 통에 한참을 어리둥절했다. 그게 검은색과 흰색으로 칠한 운동화의 별명이라니. 범고래가 속한 신발 시리즈의 이름이 ‘조던’이고, 그 시리즈는 나이키의 신발 라인 중 가장 유명하며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린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한정판이 있고, 추첨 결과를 기다리거나 매장 앞에 줄을 선다는 건 아무리 들어도 믿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겹의 시간이 지난 23년 4월, 한 영화가 조용히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이름은 단 두 글자, ‘에어’였다. 포스터를 본 순간 비행 관련 영화인 줄 알았다. 맷 데이먼이 이번엔 항공사 직원을 맡아 비행기 추락을 막는다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오해했다. 나이키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수상하게 디자인한 제목 위, ‘누구에게나 점프하는 순간이 온다'라는 문장에서 비로소 정체를 깨달았다. 나이키가, 아니 운동화가 영화로 나와버린 것이다. 그 범고래 신발을 끝내 신고 나타난 동기의 자랑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흔한 재난 영화나 액션 영화쯤으로 치부하고 박스오피스 숫자나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좋은 영화 한 편을 또 놓쳐버렸을 것이다.

 

영화 '슬램덩크'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단정한 자신감에 끌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화는 나이키의 전설적인 농구화 ‘에어 조던’을 다루고 있다. 엄밀히는 그 신발이 탄생할 수 있게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이야기가 전부다. 실제 신발 이름은 에어 조던이지만, 마이클 조던에 대한 영화로 오인될 수 있어 제목에 ‘조던’까지는 붙이지 않은 것 같다. 그 막대한 홍보 효과를 산뜻하게 제껴버리고, 나이키나 조던이라는 고유명사를 다 덜어냈다. 제작진과 마케터의 결단이 놀랍다. 공기처럼 가볍고 쿨한 영화의 이름은 나를 간헐적 행동파로 만든 슬로건 ‘Just Do it’과도 닮았다. 참 단정한 자신감이다.

마침 올해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성공적으로 포문을 열어젖힌 시기이기도 했다. 장항준 감독의 영화 <리바운드>까지 더해 일종의 농구 영화 3부작이 전편의 인기가 식기 전에 이어달리기처럼 연달아 개봉했다. 슬램덩크로 농구의 재미를 맛본 터라 이상한 호감과 의리가 발동했다. 큰 고민 없이 두 영화의 티켓을 끊었다. 그냥, 일단 보자. 한동안 신발장에서 빛을 보지 못한 나이키 운동화도 꺼내 신었다.

 

영화 ‘에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그들도 꼴등인 시절이 있었다

영화 <에어>는 나이키가 업계 꼴찌였던 1984년을 배경으로 한다. 회의 도중 누군가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우리랑 같이 일하고 싶을 리가 없잖아’, ‘그게 될 리가 없잖아’ 같은 말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96년생인 나에게 나이키는 거대 기업이자 대표적인 브랜드여서 그들이 패배의식에 젖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마치 연극에서 뻔히 보이게 숨어있는 인물을 찾는 설정이 나오면, 당신 뒤에 있잖아요!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랄까. 모두가 나이키 앞에 펼쳐질 어마어마한 미래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고 카메라로 포착하는 연출이 그 자체로 흥미롭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평사원 소니는 맷 데이먼이, 나이키의 대표 필 나이트는 벤 에플렉이 뻔뻔하게 분한다. 할리우드 대표 콤비가 자조적으로 초라한 척을 하는 것도 웃음을 더한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맷 데이먼과 벤 에플렉은 10살 때부터 각별한 우정을 나눴다. 맷이 하버드에 재학 중이던 시절, 수업 과제로 벤과 완성한 시나리오가 바로 <굿 윌 헌팅>이다. 20대에 미국 아카데미 등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영화계를 뒤흔든 두 청년은 이후 배우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간다. 맷 데이먼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부터 <오션스> 시리즈와 <본> 시리즈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다 <마션>으로 정점을 찍고 놀란 감독과 <인터스텔라>와 <오펜하이머>까지 함께 한다. 평단과 대중을 모두 만족시켜온 엘리트 배우다.

벤 에플렉은 <아마겟돈>, <진주만>에 이어 배트맨 역을 맡으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초창기 연기력 논란을 극복하며 <할리우드랜드>, <나를 찾아줘>로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했고, <아르고>를 연출하며 그 해 영화제를 휩쓸었다. 모범적인 맷에 비해 미투(Me Too)와 알코올 문제 등도 불거졌지만, 사과와 함께 이후의 행보로 다시 영예를 되찾았다. 여담으로, 동생인 케이시 애플렉 또한 성추행 파문 이후 맷 데이먼이 제작한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재기에 성공하며 형과 함께 훌륭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영화 ‘에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그냥,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그런 두 사람이 제작, 감독, 주연까지 맡은 영화가 바로 <에어>다. 그들이 어떤 포인트에 꽂혀 영화 만들기에 뛰어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극 안팎에서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웃음과 휴머니즘이 크게 다가왔다. 영화에서 소니는 회사의 명운을 걸고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을 모델로 캐스팅한다. 당시 조던은 NBA에서 떠오르는 선수이긴 했지만 지금만큼의 명성을 얻기 전이었다. 슈퍼스타가 아닌 유망주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줄줄이 제시하는 일은 도박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다만 조던의 거대한 잠재력을 알아본 소니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절실하게 밀어붙인다. 한 마디로 영화는 에어 조던 시리즈의 출시담인 것이다.

실제로 당시 체결한 계약 덕분에 마이클 조던은 운동선수 최초로 억만장자 리스트에 올랐고, 나이키는 명실상부한 대표 브랜드가 됐다.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는 상승효과를 더한 결과다. 영화는 제목부터 암시했듯 농구 경기 장면이나 마이클 조던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비추지 않는다. 오직 계약이라는 소재 하나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 어느 정도의 각색은 있지만, 과정이 너무나 극적이었고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잭팟이기에 이미 그 자체로 영화였다.

극장을 나오면 운동화를 사고 싶거나 개인적인 성공을 거두고 싶어질 것 같지만, 그저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승승장구하는 이후를 보여주지 않고, 지금은 성공했지만 언더독이었던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에만 집중한다. 그 오래전의 뒷모습이 주는 위로의 힘이 크다. 나서서 뽐내지 않아도 발산하는 자신감과 열정적인 사람들의 에너지가 관객을 매료시키기도 한다.
 

우리의 동백꽃도 언젠가는 활짝 핀다

그러니 농구 영화라고 부르기엔 애매하다. 이 영화를 봐도 나는 여전히 농구의 기본적인 룰도 알지 못한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회의를 하고 전화를 받는 장면만 주구장창 나올 뿐이다. 엄밀히는 의류 브랜드 직원의 계약 분투기가 전부다. 그러나 소니에게는 대표인 필 나이트, 디자이너 피터 무어(매튜 마허), 마케팅 부사장 롭 스트라서(제이슨 베이트먼) 등의 동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가 달린 경력을 걸고 함께 밤을 지새운다. 직급이 높다고 일을 편하게 하거나 위험 부담이 줄어들지 않는다. 더 큰 책임감과 막대한 부담감이 주어진다. 위험한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동료의 직감을 믿고 힘을 모으는 진심과 열정에 나이키를 1순위로 고려하지 않았던 조던은 끝내 계약 체결에 응한다. 영화의 리듬감과 구슬땀을 흘리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그야말로 한 편의 스포츠다.

포스터에 적힌 문장을 다시 음미해본다. 누구에게나 점프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 지난 백상예술대상에서 오정세 배우는 수상소감으로 화제가 됐다. 그가 한 말에 영화의 핵심이 전부 담겨있기에, 마지막으로 옮겨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무엇을 하던 간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기를. 거기에는 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기를. 그냥 하다보면 언젠가 상상도 못한 아름다운 미래가 다가와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매 작품마다 참여할 때마다 개인적으로는 작은 배움의 성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중략) 지금까지 한 100편 넘게 작업을 해왔는데요. 어떤 작품은 성공하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심하게 망하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좋은 상까지 받는 작품도 있었는데요. 그 100편 다 결과가 다르다는 건 좀 신기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100편 다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열심히 했거든요. 그럴 때 생각해보면 제가 잘해서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제가 못해서 망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상에는 참 열심히 사는 보통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이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꿋꿋이, 또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고 지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던 간에 그 일을 계속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그냥 계속 하다보면은, 평소랑 똑같이 했는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와 보상이 여러분들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저한테는 동백이가 그랬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곧, 여러분만의 동백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힘든데 세상이 못 알아준다고 생각할 때 속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곧 나만의 동백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요. 여러분들의 동백꽃이 곧 활짝 피기를 저 배우 오정세도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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