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 정약용이 가장 숭배하고 존경하던 학자는 성호 이익이었습니다. 성호의 학문과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가 다산이었습니다.

다산의 일생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긴 책은 『사암선생연보』인데, 나이 16세 때에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았다. 이때 일세의 후학들이 이 선생의 학문을 조술(?述)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다산공도 이를 준칙으로 삼았다. 항상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말하기를 ‘꿈속 같은 내 생각이 성호를 따라 사숙(私淑)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보이듯, 다산의 학문은 바로 성호 학문의 계승임을 역력히 알게 해줍니다.

박석무 다산학자 ⓒ위클리서울 DB
박석무 다산학자 ⓒ위클리서울 DB

이런 기록 이외에도 많은 다산의 기록에는 성호 선생을 예찬하고 그 위대한 학문에 대하여 존숭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산이 성호학을 계승하고 이어받기 위해서 열었던 강학회를 보면 더욱 다산학문의 근원이 성호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795년 겨울, 다산은 천주교 문제로 비방이 끊이지 않자, 금정도찰방으로 귀양살이 같은 벼슬로 좌천되는데, 그때 다산은 성호의 종손(從孫)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을 강장으로 모시고 그 지방 소장 학자들을 모아 강학회를 열었습니다. 온양의 서암(西巖)에 있는 봉곡사(鳳谷寺)라는 절에서 13명의 학자들이 10일 간 함께 숙식을 하면서 성호 선생의 학문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하였고 『가례질서』라는 책을 교정하는 일까지 마쳤다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강학회, 즉 학술대회의 결과보고서인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라는 장문의 글을 보면, 당시 학자들이 진지하게 학술을 토론하고, 질의와 응답을 통해 성호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더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호에게 직접 학문을 배운 종손자 이삼환이 강장으로서 질문에 답한 내용 또한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학문을 토론하던 여가에는 시를 짓고 읊으면서 선비들의 풍류까지 넉넉하게 즐겼던 그런 멋진 학회였습니다.

수많은 질문과 응답이 있는데 강이중(姜履中)의 질문에 목재가 답한 내용이 의미가 깊습니다. “강이중이 목재에게 물었다. 성호 선생은 박식하고 달통하기가 그와 같았는데 남에게 질문한 적도 있었는가요? 목재가 답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평생에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혹 자신이 저술한 책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견해라도 말하면 아무리 몽매한 초학자의 말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다 들어주었으며, 진실로 그가 한 말에 취할 점이 있다면 바로 고치고 바꾸기를 지체 없이 하였으니, 그분의 겸손함과 용기 있음이 그와 같았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호 선생의 학문적 자세는 ‘겸용(謙勇)’이라는 글자 두 자에 있었습니다. 많이 안다고 잘났다고 거만하거나 으스대지 않고, 참으로 겸손하게 누구에게도 묻고, 누구의 지적도 바른 것이면 바로 고치고 바꾸는 그런 용기까지 지녔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학자의 자세인가요.

참다운 학자란 언제나 자기를 낮추고, 남의 말에 경청하며, 옳은 것은 언제라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학문적 태도만으로도 성호 선생은 참으로 위대한 학자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반드시 학문에 있어서만 일이요, 모든 일에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의 지적에 바르게 수용하는 그런 겸손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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