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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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우리 동네 아파트 초입엔 작은 붕어빵 포차가 하나 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먹는 걸 보면 맛은 증명된 셈이었다. 나 역시 가끔 이곳에 들러 붕어빵을 사먹는데 오늘 아침엔 너무 일찍 간 모양인지 이제 막 붕어빵 기계에 예열을 하는 중이었다. 붕어빵 포차 주인은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였는데 깔끔한 인상에 순해 보이는 남편과 수더분하지만 말이 별로 없고 곁을 잘 내주지 않게 생긴 아내가 장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봐요.”

“아..아니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실래요?”

붕어빵 기계에 불이 잘 올라오지 않는다는 아내 말에 남편은 가스통을 갈기 위해 아내 등 쪽을 쑤시고 들어가 엉덩이를 하늘로 쳐든 채 낑낑 거리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부부가 서로 몸을 붙인 채 부비적거린다 싶더니 아내가 남편에게 짜증스럽게 한 마디 톡 쏘아 붙였다.

“밖으로 나가서 해야지! 그게 지금... 왜 그래 진짜!”

머쓱해진 남편이 밖으로 나가며 나를 슬쩍 쳐다봤다. 손님 앞에서 한 마디 들은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쓰여 내가 슬쩍 농담 한 마디를 건넸다.

“여기가 붕어빵 줄서서 사먹는다는 그 유명한 가게가 맞나요?”

“어머. 그거, 예전에 무르팍 도사에서 나오던 멘튼데 오랜만에 들어 보네요, 깔깔...”

“여기 맛있다고 동네에 소문이 쫙 났더라구요.”

어느새 표정이 밝아진 남편이 대화에 슬쩍 끼어든다.

“저희야 늘 고맙죠. 많이 찾아주셔서요.”

“여기서 장사한지 오래 되셨어요?”

“3년짼가.. 벌써 그렇게 됐네요.”

그 사이 아내가 붕어빵 틀에다 반죽만 조금 부어 구워낸 밀가루 과자를 내게 내밀었다.

“이거 맛있어요, 바삭하고 담백한 게. 한번 드셔보세요.”

“아니, 이게 그 유명한 붕어빵 껍질인가요!!”

“깔깔. 그러네요. 생선 껍질이죠 이게.”

남편도 따라 웃는다. 어느 새 맛있게 구워진 오늘의 첫 붕어빵이 나왔다. 노릇노릇 따끈한 팥 붕어빵, 슈크림 붕어빵들이. 그걸 가슴에 안고 돌아서려는데 아내가 날 불렀다. ‘저기요, 이거 하나 더 가져가세요. 오늘 날씨도 춥고 몸도 찌뿌둥했는데 고마워요......’

맛있게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 돌아보니 붕어빵 부부가 함께 웃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따뜻한 붕어빵 봉지를 가슴에 안고 있으려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예전에,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남편하고 내가 부부싸움을 하면 둘째 아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엄마 아빠가 다투는 게 싫어 그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이가 상처를 받든 말든 싸움을 멈추지 못 했다. 나는 어떻게든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고 남편은 내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았다. 둘 다 자기밖에 몰랐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 아이는 으르렁거리는 부모 사이에 껴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이었는데 말이다.

언젠가 한번은 아이들에게 정식으로 그때 일을 사과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러지 못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둘째에게서 전화가 왔다(기가 막힌 타이밍). 그래서 오래토록 미뤄둔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불쑥 사과를 해버렸다.

‘너희 어렸을 때 말야, 엄마가 아빠하고 싸운 것 때문에 상처 받은 적 많았지? 그땐 엄마도 너무 어리고 미숙해서 그랬어, 미안해...’ 그러자 아이는, 벌써 다 잊어버린 옛날 일인데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엄마,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갑자기 학교 가기 싫다고 방에서 안 나온 적 있었잖아. 한 달 정도 그랬나. 그때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학교 안가도 된다고 그랬던 거 기억나요? 말은 안 했지만 그때 진짜 고마웠어요. 그거로 충분하니까 우리 어렸을 때 일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알았죠?’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는 아들이 고마웠다.

중2병을 심하게 앓던 아이는 어느 날 불쑥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맘 같아서는 ‘뭔 x소리야!’ 라고 혼내고 싶었지만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싶어 내버려뒀다. 한 동안 방에만 처박혀 있던 아이는 한 달이 지나자 심심했는지 학교 담벼락 근처에서 서성이다 교감선생님 눈에 띄어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 시간동안 남편도 나도 힘들었지만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자고 서로를 설득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싸워대던 철없던 부부가 그래도 자식을 키우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어쨌거나, 내 못난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주고 상처도 받았을 아이는 그때 일을 쿨 하게 용서해 주었고 나는 마음의 짐 하나를 내려놓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받은 건 모르고 자기가 해준 것만 기억한다는데 부모가 해준 걸 잊지 않고 고맙다 말해주는 아이가 고마웠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상처, 그 중에서도 엄마와 아빠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함으로 인해 받는 상처가 크다는 걸 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의 기억이 두고두고 원망과 미움, 자신의 인생에 미친 영향을 곱씹으며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굳어버린 시멘트 위에 선명하게 남겨진 자국처럼 지워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상처를 아이들은 가슴에 품고 산다. 다 잊었다고, 별 거 아니라고 말 한다고 해도 결코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런 상처자국은 남기지 않고 살아야 되는 게 맞다.

지금도 가끔, 둘째 아들이 차 안에서 부르던 그 노래 소리가 생각난다. 별 것 아닌 일에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우던 엄마 아빠 사이에 껴서 메들리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던 아이. 그때 나는 왜 싸움을 멈추고 미안하다며 아이를 안아주지 못 했던 걸까. 따듯한 붕어빵 하나를 더 넣어주며 고맙다고 웃어주던 그녀처럼......

그러므로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어쩌면, 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때론 노래가 소리 내어 우는 것보다 더 슬플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말이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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