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 사라 헨드렌 저, 조은영 역, 김영사 2023

책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 표지 ⓒ위클리서울/ 김영사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지금은 앱 개발과 디자인을 공부하는 내 중학교 친구 S는 원래 조경학을 전공했다. 중학교 때부터 계곡의 도룡뇽을 왜 지켜야 하는지 말하고 했던 그가 조경학을 선택한 것은 내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는데, 그를 떠올리면 함께 자전거를 탔을 때 불어오던 바람과 그가 처음 들려주었던 락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다. 졸업을 한 이후 예전만큼 자주 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나는 S가 들려주는 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흥미로웠고, 그건 여전히 그렇다.

그가 한참 조경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을 때, 그는 모든 가로수의 이름을 거의 다 외웠다. 함께 걷다가 내가 나무 이름을 물으면 그는 저 나무는 무슨 나무이며 그 나무를 왜 저기에 심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앞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만들어진’ 것이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의 나무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배웠던 것 같다. 청계천의 나무들에 대해, 공원에 드리운 나무의 배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S의 눈은 반짝거렸다. 나는 지나가다 궁금한 게 생기면 그에게 물었다. 이건 왜 이렇게 되어 있어?

함께 신촌의 연세로를 걸을 때 S는 차도와 인도 사이에 돌을 보고 이야기했다. 보통의 도로라면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돌이 튀어 나와 있는데, 이 길만 이렇게 돌이 평평한 이유는 ‘차 없는 거리’를 위해서라고, 차도와 인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만들어야 사람들이 차가 다니지 않을 때에도 편안하게 그 도로에 설 수 있는 거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그럼직한 이야기라서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단순히 돌이 튀어나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괜히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 무섭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공간의 배치에 사람이 크게 영향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점점 흔한 상식이 되었지만, 나는 그게 과연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우리 앞에 모든 것들은 ‘인간’에 깊게 영향 받았다. 동시에 공간 역시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과 공간은 어떻게 상호작용할까? 종종 내가 보고 있는 건물과 사물들이 왜 딱 이 정도의 모양으로 생겼는지 궁금했다. 의자는 왜 이 정도 높이고, 책상은 왜 이 정도 넓이고, 책은 왜 딱 이 정도를 넘지 않고, 영화는 왜 한 두시간쯤 되고, 등등. 모든 인공적인 사물들이 일종의 '휴먼 스케일'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당연한 사실이 나는 종종 신기해서, 인간의 몸을 경유해 만들어진 내 앞 거의 대부분의 물건들을 자주 궁금해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때 내가 생각한 것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는 일반적인 ‘인간’ 자체이고,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구체적인 개인을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공간만 생각했지, 어느 정도의 정상성을 벗어나는 경우들은 일종의 ‘예외’ 상태라고만 느꼈던 것 같다. 결국 가장 ‘일반적인’(혹은 그렇게 설정된) 방식으로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그밖의 것들은 아쉽게도 예외에 가까워서, 큰 범위에서 이야기할 때면 조금 후순위가 된다는 것.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는 구체적인 개인의 이야기 속에 어쩌면 인간과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시작될 수 있음을 조금 배운 것 같다.

구체적인 개인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장애’다. 인간과 공간이 덜그럭거려서, 그 지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이 장애인 것이다. 나는 사실 '장애' 문제를 늘 한발자국 떨어져서 관망해 왔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은 이후로 장애와 몸, 몸과 사회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몸들이 있다. 단지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이 아니라, 그 스펙트럼 하에서 구체적인 모양으로 ‘다른’ 수많은 몸들이 있다.

 

ⓒ위클리서울/ 픽사베이

이 책은 말그대로 세상에 얼마나 '다른 몸들'이 있는지 알려 준다. 단순히 장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거주하는 수많은 '건설환경' 속에서 각기 다른 우리의 몸이 어떻게 적응하거나 불화하는지, 실은 불화하는 몸들이 얼마나 많은지 사례를 하나씩 확장해 가며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불편에 그칠 불화가 누군가에게는 편안히 이동하거나 연단에 서거나 침대에 눕지 못하게 하는 불화가 되기도 한다는 것. 그 불화를 해소해 최대한 다양한 몸이 건설환경 속에서 거주할 수 있게 하는 디자인은, '멀쩡한' 사람의 공간과 시간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에게 더 많은 '편안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 저상버스를 타며 비장애인이 느끼는 감각은 불편함이 아니라 자기도 필요한 줄 몰랐던 편안함에 가깝다.

반성 아닌 반성을 많이 했다. 나는 조금 무딘 편이라, 미세먼지도 잘 느끼지 못하고 딱딱한 곳에서 자도 큰 무리가 없다. 식당에서 주는 표준적인 1인분을 먹고, 적당히 무겁게 메고 오래 걸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이렇게 하지 못하거나 예민한 사람들을 볼 때 솔직히 왜 이렇게 유난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모두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꾸 망각한다. 반대로 나는 빛과 소리에 예민하다. 정작 유난인 것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통상적인 '1인분'이 남성 표준에 맞춰져 있다며 불평하던 친구를 보며 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유난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유난인지도 모른다. 양에 대한 선택지가 늘어나는 게 내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아니니까.

'표준적인 휴먼 스케일'로 만들어진, 우리가 마주하는 사회적 환경은 때로 특정한 젠더나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 많은 이들의 몸에 자유와 편안함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은 그렇기에 단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조금씩 배웠다. 단순히 병렬적으로 사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사례를 조금씩 적층시커 나가며 전체적인 책의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서술 속에서 조금씩 더 ‘인간과 공간’, ‘장애’에 대해 넓게 생각할 수 있었다. 더 많은 몸들이 어딘가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상상하는 것은 꼭 장애인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인간 경험의 폭을 넓히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미적인 장식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폭을 풍부하게 다시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누군가 폼잡고 말했던가. 그럼에도 나는 종종 쉽게 돌아가버리곤 하는데, 이번 책만큼은 도저히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내가 걸으며 보는 모든 환경 속에서 디자인을 읽고 싶어진다. 쉽게 올라탈 수 있는 버스와 쉽게 올라탈 수 없는 버스를 나누어 생각하고, 내가 손쉽게 넘어다니는 낮은 턱들이 누군가에게 절대 넘어갈 수 없는 한계가 될 수 있다는 걸 자주 느낀다. 날이 갈수록 인간이 좋은 방식으로 발전한다고만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조금씩 더 나아지는 쪽이 좋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상황과 매일 살아가는 일상의 환경 속에서 더 자유롭기를 바란다. 자유로운지도 모르고 자유롭기를 바란다. 어쩌면 디자인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의 일이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