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이나다도요시 저, 황미숙 역, 현대지성, 2022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몇 달 전부터 지인들과 독서 모임을 함께 하고 있다. 함께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통상적인 독서 모임처럼 직접 만나거나 온라인상에서 시간을 잡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저 선정된 책을 한 달에 한 권 읽고 한 줄 짜리 코멘트 혹은 카피를 쓴다. 랜덤으로 정한 순서대로 한 달에 한 번, 그 달마다 읽을 책을 정한다. 다른 기준은 없다. 단지, 너무 두껍지는 않은 책으로. 최소한 400페이지는 넘기지 않도록. 한 사람이 정하면 그냥 읽는 것. 덕분에 평소라면 모르거나 읽지 않았을 책을 읽고 있어서 좋았다. 장르도 스타일도 다른 책들을 접하게 되고, 맨 처음 책이었던 '수수께기의 국가 소말릴란드'라는 미승인국 소말릴란드에 대한 일본 작가의 르포는 내가 논픽션을 사 읽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주로 문학과 철학만 읽었던 내게, 임의로 주어지는 책들은 새롭고 소중하다.

 

ⓒ위클리서울/ 디자인=이주리 기자

이번에 읽게 된 책은 빨리 감기에 대한 책이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배속 시청을 가지고 꺼낼 말이 뭐가 그렇게 많을까 싶기도 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작은 이야기를 통해 중요한 지점을 짚어내고 있는 책이라고 느꼈다. 기본적으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출현을 콘텐츠 시장의 변화와 이어서 보는 책이다. 사람들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대와 세대의 변화가 보인다는 것이 생각이 책의 바탕이다.

오늘날, 콘텐츠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그에 맞춰 사람들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예전보다 사람들이 더 바빠진 것도 사실이지만, 콘텐츠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이 늘었다는 사실 자체도 중요하다. 아무리 시대와 세대가 바뀌어도, 사람이 하루 24시간을 사는 것은 동일하다. 콘텐츠가 부족한 시절에는, 어떤 콘텐츠를 감상 혹은 소비해야할지 열심히 고민할 필요가 적었다. 편성표를 보고 티비 앞에서 기다리거나, 그냥 틀어 놓거나, 기다리던 영화나 만화가 있으면 대여점에 가거나, 서점에 가거나.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영화관에 가서 보거나 한 작품씩 사서 봐야했던 영화마저, 여러 OTT에 들어가면 사실상 무제한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게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쾌락을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게 중요해진 상황. 구하기 어려운 작품을 아껴 감상하던 시간은 지났다. 아껴 감상하던 작품에서 재빨리 스크롤하는 콘텐츠의 소비로, 지형이 변화했다는 것. 늘어난 콘텐츠의 파도 속에서 유행의 속도도 지나치게 빨라졌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유행하는 콘텐츠의 내용을 대략이나마 알면 좋다. 그러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앉아서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있기에 할 일은 많고, 볼 콘텐츠도 많다. 이때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배속시청 즉, ‘빨리 감기’다.

책의 제목을 처음 읽고, 누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볼까? 왜 그렇게 볼까?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영화는 아닐지라도 나 역시 유튜브 영상을 배속으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드라마를 요약해 짧게 편집한 영상들도 자주 봤다. 다 보기엔 시간이 아깝고, 효율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즐기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부모님이 챙겨 보는 드라마의 내용도, 나는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 드라마 봤어? 부모님이 물을 때 아니 요약 영상으로 봤어, 라고 답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적어도 3년이 안 되었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너무 자연스러워 나조차도 이런 변화를 몰랐다.

나와 부모님의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닿아 있다. 나는 금세 드라마나 유튜브 콘텐츠를 빨리 감기로 보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부모님은 어지간하면 원래의 속도로 본다는 것. 그러니까, 이 책이 함축하는 것은 ‘세대론’이다. 왜 요즘 젊은 세대들은 유독 배속 시청, 요약 동영상, 효율적인 소비/감상에 쉽게 녹아들었을까? 저자는 요즘 젊은 세대의 특성을 분석한다. 거칠게 잡아 1981년 이전의 태어난 세대와 이후의 세대들의 경험은 다소 다르다. 그 앞의 세대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 속에서 자라야 했다. 그들은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찾고 싶었다는 것. 자기 욕망을 중시하며, 자아실현을 욕망했다. 지금은 586이 된 386세대의 에너지와 90년대 문화를 이끌었던 X세대의 자기표현을 떠올려 보라.

 

ⓒ위클리서울/ 현대지성

그렇다면, 그렇게 자라서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세대에 의해 길러진 새로운 세대들은 어떻게 자랄까? 그들은 위의 세대들과는 다르게, 반대로 '자아실현'을 하라는 사회적 요구를 겪는다. 너의 취미를 찾아라, 네가 즐거운 것을 해라, 남 눈치 보지 마라, 타인을 존중하고 소수자를 배려하라.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나’를 찾으라고 한다. ‘나’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고, 고유한 ‘나’를 찾아내 보여 달라는 압력을 받는다. 덕분에 자기가 진짜 뭘 좋아하는지를 모르겠어서 방황하고, 취미가 없다는 것에서 압박감을 느끼고, 타인/소수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틀 속에서 대화의 여지를 배려라는 이름으로 닫기도 한다.

깨부수거나 기댈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전보다 줄었다. 알아서 좋아하는 걸 능력껏 하면 된다. 정확히는 '해야 한다.' 결국 ‘좋아해야만 할 것’을 찾는 새로운 세대의 압박감이 '빨리 감기'로 나타났다는 게 저자의 분석 중 하나다. 어떤 세대든 각각의 문제를 각각의 방식으로 안고 있다는 지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고작 배속 버튼 하나에서 세대의 짐이 드러난다. 한 세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다른 세대는 문제없이 사는 게 아니다. 문제에서 새로운 문제로 옮겨 가는 게 세대의 변화다. 물론 더 나은 문제로 옮겨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의 원서는 2021년에 일본에서 발간되었다. 책이 다루고 인터뷰하는 것도, 일본 사회와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이름만 한국인으로 바꿔 놓으면, 한국을 대상으로 했다고 해도 모를 정도였다. 한국인이 인터뷰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별다른 이질감이 없었다. 요새 젊은 일본인들의 반응이 요새 한국 젊은이들과 상당히 비슷하게 느껴졌다. 막연하게나마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한국과는 꽤 다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콘텐츠 소비 측면에서는 생각보다 너무 비슷했다.

콘텐츠 많다. 시간 없다. 남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걸 보고 싶다. 무언가 취미를 가져야 한다. ‘갓생’을 살아야 한다. 어쩌면 전세계적 변화의 양상일지도 모르겠다. 콘텐츠의 기하급수적인 증가, 개인주의의 확산은 어느 정도 공통적인 현상이기도 하니까. 지금의 젊은 세대가 겪는 새로운 압박감은 이제 또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며, 그다음 세대는 어떻게 자라날까? 이제 돌을 넘은 친구 아이의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그때 우리는 어떤 버튼으로 세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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