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저, 이재형 역, 휴머니스트, 2022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독서 모임에서 읽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 누아르 소설이다. 누아르에 큰 관심이 없는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 독서 모임 특유의 장점 때문이다. 우리는 따로 모임을 갖지도 않고, 거저 선정된 책을 한 달에 한 권 읽고 단 한 줄의 코멘트만 달면 된다. 어떤 강제력도 없다. 랜덤으로 순서를 고르고, 그 순서대로 읽을 책을 정한다. 다른 기준은 없다. 한 사람이 정하면 그저 읽는 것. 덕분에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 책을 접하게 된다.

 

ⓒ위클리서울/ 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 이주리 기자

별다른 강제력도 없는데 사람들이 꾸준히 참여하는 걸 보면, 이 모임은 참여자들에게 꼭 한 달에 한 번씩 랜덤으로 배송이 오는 구독 서비스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아무런 선정의 기준도, 협의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구독 서비스. 나의 취향을 무너뜨리는, 그렇기에 내 작은 세계를 넓히는 구독 서비스. 점점 더 각자의 취향으로만 채워가는 이 세계에, 나의 세계 바깥의 것들을 만날 기회가 오히려 소중하다는 것을 종종 느끼곤 한다. 그렇게 읽은 이 책은 나의 세계를 조금은 넓혔다. 좋은 방식으로? 적어도 질문거리를 잔뜩 남겼다는 면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20세기 초반의 미국이다. 흑인이지만 피부가 하얗게 태어나(마이클 잭슨도 앓았던 백반증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거의 백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있다. 흑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공공연했던 시대, 남자의 동생은 백인 여성과 데이트를 하다가 그 여성의 아버지에게 살해 당한다. 여러 힘든 과정을 거쳐 유럽에서 겨우 살고 있던 남자는 동생의 죽음을 알고, 미국으로 돌아와 복수를 다짐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남자가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중산층 백인 여성 자매다. 남자는 아무튼 어떤 백인을 죽이고 싶었고, 죽일 사람을 모색하기 위해 연고 없는 동네로 부러 흘러 들어가 서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동네에 천천히 섞이며 길거리 백인 청소년 사이에 섞이게 되었지만 그들을 죽일 생각은 딱히 하지 않는다. 복수의 대상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남자는 그의 탄탄한 몸을 미끼로 길거리 아이들과 온갖 섹스를 하며 돌아다닐 뿐이다. 그러다 초대받은 파티에서 약간 먼 타지에서 온 백인 자매를 마주치고, 그들을 목표로 삼고, 치밀한 밑작업을 통해 로맨틱하고 섹슈얼한 방식으로 두 자매를 모두 꾀어 내고, 잔혹하게 죽인다. 끝.

인종차별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흑인이 복수를 위해 복수와 무관한 백인을 죽인 이야기다. 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소외된 노동자 계층이 복수를 위해 복수와 무관한 중산층을 죽인 이야기다. 젠더의 관점으로 말하면, 남성이 복수를 위해 복수와 무관한 여성을 죽인 이야기다. 이외에도 이 이야기의 또다른 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떤 이야기인 것일까? 이 세 관점을 모조리 섞어 놓은 것이 이야기이고, 어쩌면 현실은 이야기보다 더 복잡할지 모른다. 권력과 차별의 축은 결코 하나의 기준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여러 축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그러니 이 소설을, 복잡하게 교차하는 차별 속에 고통 받은 사람이 일그러진 복수심으로 백인 중산층 여성을 살해한 이야기라고 읽으면 될까? 혹은 어떤 측면의 약자의 분노가 강자를 향하지 못하고, 또다른 약자에게 향해 쏟아진 이야기라고 읽으면 될까?

호의적으로 읽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서사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 서사를 다루는 태도다. 작가는 ‘백인처럼 보이는’ 흑인 남성 주인공의 치밀한 계획, 방종, 범죄를 속도감 있게 따라가며 온갖 자극적인 묘사를 덧대어 놓았다. 작가인 보리스 비앙은 이 소설을 2주만에 썼다고 밝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작가는 주인공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느끼는 모멸감, 복수심이 너무나도 뚜렷하고 직설적으로 그려진다. 그 분노는 곧바로 백인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된다. 이 소설에서 백인 여성들은 오래된 여성혐오의 전형을 따른다. 성적으로 방종하거나, 조신한듯 보이지만 실은 감추어둔 욕망을 결국 남성에게 위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백인에 대한 분노는 여성에 대한 혐오로 말없이 흘러 치닫는다. 그리고 채워지는 폭력의 자극적인 묘사들.

 

보리스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표지 ⓒ위클리서울/ 휴머니스트

이 소설은 1940년대에 쓰였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이 유명세를 얻은 것은, 어느 살인자의 집에서 이 책이 밑줄이 그어진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책은 프랑스에서 50만부 넘게 팔렸다고 한다. 1940년대의 극단적인 남성향 인터넷 소설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의 ‘비윤리성’에 대한 분석은 세심하게 따져볼 문제이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재미’다. 나는 50만부 이상 팔린 이유가, 그때 이 책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어떤 작품의 비윤리성에 대해 지적하면, 예술에 왜 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미냐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미 출간될 당시에 바로 ‘금서’가 되었고, 작가도 논란을 알고 있었다. 물론 금서가 된 이유가 당시 사회 분위기의 ‘보수성’ 때문이라고 해도 말이다.

예술이 반드시 상식의 기준에서 완전히 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소설을 오늘날의 읽는 몇몇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전혀 재밌지 못하다. 비윤리적인 부분이 있어 재밌지 않은 것이 아니다. 충분히 재밌게 느끼는데 도덕적인 판단 때문에 재미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부려 놓은 체하지만 실은 자신만의 환상을 충족하며 혼자 즐기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보이면, 재미있기 힘들다. 그것은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글이 되기 십상이고, 조금 나아가도 어떤 쾌락을 공유하는 집단의 전유뮬로 그치기 쉽다. 심지어 단지 쾌락을 위한 글일 뿐인데, 거기에 어떤 대단한 의미를 붙여 놓고 있다면, 더더욱 재미있지 않다.

프랑스 백인이 이 소설을 썼다는 점도 흥미롭다. 누아르를 한 번 써보고 싶은 백인 작가가 쓴,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살해한 이야기라고 생각해 보자. 이 이야기의 테마에서 우리는 사회적 약자의 분노가 어떻게 다른 층위의 약자에게 향하는지를 세심하게 돌아볼 수도 있겠으나, 소설 자체는 그 주제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소설의 속도감 있는 묘사는 남성의 범죄에 몰입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것은 범죄의 쾌략이다. 그게 나쁜가? 어떤 면에서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쾌락만을 위한 쓰기와 읽기에 다른 층위의 논의를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내게 이 소설은 이 소설이 팔렸던 시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료 같았지, 지금 우리 앞에 놓일 책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 더 마음대로 나아가 보자면, 미국 흑인 남성의 섹슈얼한 매력으로 ‘멍청한’ 백인 여성들을 후리고 다니는 이야기를 쓰면서 누구보다 만족했을 사람은 백인 작가 자신이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판타지의 소비를 위해 쓰인 게 아닌가 하는, 오로지 거기에만 머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나는 떨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내게 재미없다. 그러나 이야기가 판타지의 소비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이야기는 종종 판타지의 소비만을 위해 쓰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판타지가 약자에 대한 편견과 폭력을 즐기고 강화하게 만든다면, 유해하다. 그렇게 하면서 아닌 척을 하고 있다면 더 유해하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그러나 이 소설의 한국어판 출간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옆에 두고 함께 논의해 보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이 아닌가. 이 소설이 내일아침 갑자기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면, 또다른 사회의 징후를 곰곰이 따져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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