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 저, 민음사, 2023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박솔뫼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장소를 뚜렷이 기억한다. 5년 전, 갑작스럽게 제주에 하루 자고 오는 여행을 계획했던 것은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같은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때는 그걸 몰랐기 때문이다. 혹은 모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일하는 카페까지는 제주시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렸고, 스쿠터를 빌려 타고 해안가 도로를 달렸다. 스쿠터를 빌려 탄 여행은 처음이어서 한동안 살짝 비틀거리다가 바로 제대로 운전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때가 나의 두 번째 제주 방문이었는데 그전까지 축축하고 비가 오는 섬으로만 생각했던 제주는 육지와는 확연히 다른 바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지나치게 밝은 날씨에 나는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 오로지 도로를 타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충분했다.

 

ⓒ위클리서울/ 정다은

후배의 일이 끝날 때쯤 일터로 찾아가기로 했기에 스쿠터를 타고 빙빙 돌았다. 한참 제주에 독특한 책방이 많이 생기고 있을 즈음이라 주변 책방을 찾아 가기로 했다. 후배가 몇 개 알려준 곳 중 하나를 골라 찾아간 책방에는 고양이가 있었고, 사람들이 편하게 걸터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생각해 왔던 책방과는 다르게 앉거나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쿠션도 받을 수 있었다. 스쿠터를 타고 멀리 달려왔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가를 둘러보다 책 한 권을 골랐는데 그게 바로 박솔뫼의 소설 <백행을 쓰고 싶다>였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집어든 책을 들고 편하게 앉았고, 나는 이례적으로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얼마나 재밌었길래? 분명 재미가 있었는데, 그 재미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은 ‘해만’이라는 가상 바닷가 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진 일들을 다루고 있었다. 더 설명하고 싶지만 더 설명하기 어렵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좋다고 여러 명에게 추천하면서도 같은 낭패를 겪었다. 추천의 이유를 물으면 할 말이 요원했다. 분명히 재밌다 말했지만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설명하려면 설명할 수야 있던 때도 있었지만 그걸로 이 소설의 좋음에 대해 전달하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그 소설을 좋아했던 것은 단지 그 소설을 이루는 문장을 따라가는 것 자체를 즐겼기 때문인 것 같다.

해만, 이라는 바닷가 도시를 배경으로 만드는 문장을 나는 계속 따라갔다. 바닷가 근처에서 읽는 바닷가에 대한 말들과 무덤덤한 서늘함으로 어떤 마음이 담백하게 묶여 이어지는 것 자체를 따라갔다. 내가 읽는 문장과 내가 있는 공간이 섞였다. 책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런 것을 몰입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무슨 스릴러 영화를 볼 때의 몰입과는 다르게, 나는 단지 문장을 따라가는 것에 몰입했다. 계속 해만을 느끼면서 말이다.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갈급함도 무언가를 배워내려는 조급함도 없이 오로지 읽는 것 자체만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런 읽기란 과연 무엇일까? 여행지의 공간과 소설의 공간이 만들어낸 흥미로운 상태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을 알고 있다. 어떤 글들은 분명 그렇게 읽히기를 바라고 있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표지 ⓒ위클리서울/ 민음사

내가 어떤 메세지를 언어와 서사에 담아 정리해 전달할 테니, 언어라는 껍질을 벗기고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글들은 충분히 많다. 많은 글들이 그렇게 쓰인다. 그러나 어떤 글들은 마치 메세지 같은 걸 품어내고 싶지 않다는 듯, 혹은 메세지는 어디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에 있다는 듯 이어지는 글들도 있다. 언어를 ‘체험’하게 만드는 글들 말이다. 언어를 벗기라고 하는 대신 언어를 입으라고 하는 글들 말이다. 나는 지금 지나치게 꼬아서 말하고 있다. 그런 글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쉽다. 이게 그래서 뭘 말하는 거야? 라는 감정이 들게 하는 글들. 문장이든 내용이든 앞으로 계속 미끄러지는 글들.

이를 테면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꿈같은 상황들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남대문의 갈치조림 식당은 중앙식당입니다.”라는 문단으로 마지막을 내는 글들. 나는 박솔뫼가 이 책에 쓴 이 문장을 보고 이 책을 샀다. 처음부터 책으로 만난 것은 아니고, 나는 이 책이 책으로 묶이기 전, 민음사에서 발행하는 ‘릿터’라는 문예지에서 이 글들을 처음 읽었다. 형식이 특히 흥미로웠다. “0시, 0시, 7시”라는 제목을 달고 진행되는 연재였는데, 작가들이 있는 곳의 시차를 의미했다. 서울, 도쿄, 베를린에 있는 세 작가가 함께 글을 쓴다. 함께 글을 쓴다고는 하지만, 단지 같은 기간에 각자의 글을 쓰고 서로 느슨하게 공유한다. 주제 같은 것은 따로 없다. 상대 작가에게 응답할 필요도 없다. 다만 계속 쓰고 싶은 에세이(뭐라고 부르기 힘든 글을 우리는 에세이라고 부른다)를 쓴다.

각기 다른 세 도시에 있는 세 작가가 같이 쓰는 에세이라니, 듣기만 해도 흥미로울 법한 기획이지만 말 그대로 세 작가는 정말 각자의 글을 쓴다. 오늘 산책한 이야기부터, 어떤 음악에 대해 하고 싶은 말, 도쿄에서 만났던 사람들 등등. 내가 읽었던 릿터의 연재분은 마지막 회였다. 그 연재분에서 그들은 정말로 자신이 처한 공간과 시간과 처하지 않은 공간과 시간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예전에 박솔뫼의 소설을 즐겁게 읽었던 경험처럼 말 그대로 글을 읽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며 그 짧은 연재분을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 이거 책으로 묶여 나오면 무조건 사야지.

그렇게 사서 읽게 된 책에서 나는 비슷한 즐거움을 느꼈다. 한 권으로 묶인 이 책의 주제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뭐라고 말해야만 할까? 굳이 애를 써서 이 독특한 에세이의 기획을 가지고 멋진 한 마디를 붙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누군가를 광장에서 마주하고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할 일먼저 하는 것처럼, 세 명의 글들은 각자의 글들을 각자의 스타일로 뿜어내고 있다. 어쩌면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문체’를 읽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나는 세 작가의 문체를 번갈아 읽으면서 읽기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세 작가의 글뿐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의 글도 중간중간 끼어서 또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에 참여하는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은 채로 오로지 자기 스타일대로 할 수 있는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외떨어진 ‘자기 이야기’들은 이렇게 책으로 붙었고, 연달아 읽다 보면 어떤 이상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겨난다. 고유한 것들이 어떻게 느슨하게 연결될 수 있는지, 그 연결이 어떻게 자연스러운 마주침이 되는지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주의 바닷가에서 오로지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느꼈던 것처럼, 나는 이 책을 통해 읽고 있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냥 다른 생각 없이 글의 흐름을 타고 나아가고 싶을 때 이 책에 올라타기를 권한다. 물론 그것은, 커다란 생각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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