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오랜만에 폭설이 쏟아졌다. 엊그제까지의 우울한 세상이 모두 사라졌다. 여기저기 사방에 옛날식 이불 호청을 하얗게 빨아 널어놓은 느낌이어서 정겹다. 한달음에 달려가서 얼굴을 대고 비비면 새물내가 콧속을 금방 뻥뻥 뚫어줄 것 같다. 홀랑 벗고 뛰어들어 마구 뒹굴어대 보자는 충동이 나를 유혹한다. 내 몸이 청춘이던 시절에는 그런 충동에 제법 빠져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눈은 내린 게 아니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계속 내렸다. 처음의 정겨운 느낌은 차츰 공포로 전환되어 갔다.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고 돌아서면 또 그만큼의 눈이 쌓였다. 먹이를 찾을 수 없게 돼버린 온갖 새들이 집 주변 나뭇가지에 앉아 떠들어댔고, 눈이 가득 쌓인 지붕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조마조마, 아슬아슬, 그런 불안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드디어 체념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체념은 곧 달관을 불러들였다. 더 이상은 눈을 치우지도 않고, 지붕을 쳐다보지도 않고, 문을 살짝 열어놓은 상태로 마당의 변화하는 양상을 바라만 보았다.

마당에 꽂아놓은 태양등 위로 눈이 쌓이다가 풀썩 쏟아지고, 또 쌓이다가 또 풀썩 쏟아지는 모양이 볼 만하다. 남의 집 개 두 마리가 마당으로 들어와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맹렬하게 왕왕 짖어대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 겁먹은 모양새 또한 볼 만하다.

소설 ‘설국’이 생각났다. 일본의 눈 많은 고장이 배경인 그 소설을 내가 처음 읽은 게 아마 십대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즈음의 나는 무협지에 빠져 있었다. 본격 문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앎도 없었고, 바르게 이해할 만한 지적 감수성이나 체화할 만한 경험도 없었다.

그렇게도 무식한 내가 ‘설국’을 굳이 읽고자 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 유명세 때문이었다. 어찌나 유명했던지 안 읽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어쨌든 읽었다. 문장이 감각적이어서 눈에 쏙쏙 잘 들어오기는 했다. 머릿속은 아마 혼란과 혼돈과 혼미가 뒤섞여서 길을 완전히 잃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난해한 암호문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이 녀석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었더군.”

오랜만에 여자를 찾아온 남자가 손가락을 펴 보이며 여자에게 말한다. 여자는 감격해서 그 손가락을 잡아다가 자신의 얼굴에 댄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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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손가락이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여자의 뭘 어떻게 기억하고 있다는 거지? 의문부호가 마구 생기면서도 어쩐지 알 것 같은 느낌은 있었다. 그래서 아마 끝까지 다 읽었을 것이다. 다 읽긴 했지만, 무엇을 보았느냐고 누군가 묻기라도 한다면 할 밀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아마 이거 엄청 시시하다, 하고 애써 잊어버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 뒤로 이십 년인가, 삼십 년인가, 하여튼 꽤 많은 세월을 흘려보낸 뒤의 어느 하루 문득 그 소설이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읽으면서 놀랐다. 간단하게 그냥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설국’은 매우 야한 성인소설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알고, 남자가 여자를 아는, 그야말로 성인이 아니고서는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말초신경을 건드릴 만한 형용사나 명사 등을 완벽하게 제거 내지 차단하는 기법을 쓰고 있었다고나 할까. 상당한 인내와 분별심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하긴 그래서 본격문학과 상업문학의 경계를 굳이 지어놓고 ‘너는 아직 이 소설 안 돼’ 하는 것일 게다.

내 인생의 유, 소년기를 가장 열렬하게, 완벽하게, 압도적으로 사로잡은 이야기도 사실은 성인소설이었다. 저 유명한 ‘나무꾼과 선녀’가 그것으로, 선녀라고 하는 ‘가상’의 존재를 처음 접한 것도 아마 그 이야기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제대로 잘 소화해낼 만한 역량은 당연히 내게 없었다. 그때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을 흘려보냈지만 나는 아직도 ‘나무꾼과 선녀’의 관계를 제대로는 이해하지 못 한다. 그래서 혼잣말로 이렇게 묻곤 한다.

“나무꾼과 선녀만큼 낭만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하게 살벌하고 혼미하게 부드러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

여자가 남자를 버리고 떠나는 이야기 정도야 뭐 주변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까지 죄다 버리고 떠나는 이야기는 너무 낯설고 황당해서 이게 뭔가 싶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무슨 어마어마한 목적의식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나무꾼이 그동안 감춰놓고 있었던 날개옷을 꺼내놓았고, 그래서 그것을 걸치고 자기가 왔던 곳으로 떠난 것일 뿐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왔던 그곳은 대체 어디지?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막연하게 그냥 옥황상제라든가 하늘나라 같은 ‘가상세계’ 정도로는 풀리지 않는 갈증이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에는 있었다. 갈증은 세월과 함께 깊어지고 짙어져 갔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원 출처가 동토의 땅 시베리아 인근 바이칼 호수라는 정보를 접했을 때 나는 살짝 흥분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이냐 하는 의문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갔다.

우리의 조상들이 만주 너머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실제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론에서 오는 자긍심이랄까 안도감 같은 것은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단군신화의 지정학적 배경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하바로프스키 시 당국의 정책이 그 추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우리가 신화라고 생각하는 단군과 곰 그리고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를 하바로프스키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인식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호랑이와 곰을 시의 상징으로 채택해서 오랜 세월 자랑하고 있을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용기가 대범하지 못했다. 그냥 상상으로만 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직접 그곳을 가서 확인해 보리라, 하는 희망을 마침내 갖게 된 것은 소설가 이광수 덕분이었다. ‘민족개조론’이라고 하는 매우 얄궂은 논설을 써서 자기가 이제부터는 친일을 해서라도 조금은 윤택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사실상의 고백을 해버린 그 이광수.

그 이광수가 혈기왕성한 시절에는 침략집단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독립운동가들 뒤를 따라다녔다. 그 시기에 압록강 두만강을 자력으로 건너서 단군설화의 발원지 하바로프스키를 직접 둘러본 것은 물론이요, 나무꾼과 선녀가 만난 바이칼호수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쓴 작품이 장편소설 ‘무정’과 ‘유정’이었다. 그런 가슴 벅찬 정보를 입수하던 날 나는 속으로 장탄식을 했다.

“그렇구나. 침략자들에게 쫓기면서도 어디로든 달아날 자유 정도는 있었던 시절이었구나, 그때는.”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리웠다. 사무치게 그리웠다. 자유라는 두 음절의 단어가 그렇게도 거대한 산처럼, 바다처럼, 막장처럼 아득하면서도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인간은 어쩌자고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사방에 벽을 쌓아놓고 여기는 안 돼, 저기도 못 들어가, 하는 것인가. 심지어 김준엽, 장준하 같은 분들은 일본군 훈련소를 탈출해서 육천 리 길을 자유롭게 헤매다가 독립군과 합류하기도 했다지 않은가 말이다.

아쉬움과 원망으로 서글퍼하는 내 앞에 홀연 한 귀인이 나타났다. 학살자들 중에 한 명이라 해서 그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자 했던 사람 노태우. 그가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대오각성을 했던 것인지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택 이백만호 건설 같은 얄팍한 정치적 술수 이상의 뭐가 있으랴, 했지만 차츰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 결과 ‘북방외교’라는 것이 완성되었고, 철의 장벽 소비에트연방공화국 문이 열렸고, 일정한 자격만 갖추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바이칼호수와 하바로프스키 정도는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니었다. 일정한 자격만 갖추면 된다는 그 일정한 자격이 내게는 없었다. 주민등록 거부운동 그룹에 속해 있었던 까닭으로 일단 주민등록증이 없었고, 여권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다. 아니 뭐 굳이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토록 가 보고 싶은 곳을 비행기나 여객선 같은, 그런 식으로 빙 돌아서 간다는 것은 자존심도 상하고 영 내키지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런 일회성의 우회로가 아니라 직선이고 항구적이어야 했다. 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갈 수 있어야 했다. 언제라도 오늘이다 싶은 날 일어서서 임진강을 건너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널 수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휴전선을 철폐해야 했고, 휴전이라는 두 글자를 정전이나 종전으로 바꿔야 했다.

마침내 그날이 오는 것 같았다. ‘북방외교’를 이어받은 새로운 대통령 김영삼이 북한의 김일성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는 등 종전이 눈앞으로 바싹 다가오는 듯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렇게도 씩씩하게 활발하던 김일성이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이게 뭔 얄궂은 운명이냐, 하는 허탈감이 지금도 생생하거니와, 어쨌든 그 뒤를 이어받은 대통령 김대중이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을 만나고자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출신 사업가 정주영이 건강한 소 천 마리를 트럭에 싣고 평양을 가서 소와 트럭 모두를 넘겨주고 돌아오는 이벤트를 성대하게 치르고, 개성공단이라고 하는 획기적인 아이템이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휴전선 따위는 금방이라도 철폐될 것 같았지만, 아이고 미치겠네, 소리를 참을 수 없게 하는 지리멸렬, 뭔가 좀 될 것 같으면 상상 밖의 일이 터지면서 어그러지고, 또 어그러지는 지리멸렬의 세월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 엄청나게 숨 막히는 지리멸렬의 시간을 거치면서 나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 하나를 새롭게 인식해야만 했다. 민족이나 국가의 미래보다는 자기 개인의 재산 축적을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정치집단의 감고한 음해공작을 분쇄하지 못하면 통일이고 뭐고 없다는 거. 심지어 그런 사익추구 집단은 전쟁을 떼돈 벌이의 기회로 보고 호시탐탐 기회만 있으면 전쟁 노래를 부른다는 거.

전쟁 그 자체를 산업으로 파악하는 그런 무지막지한 욕망의 노예들을 단숨에 제압해줄 만한 귀인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바이칼을 소망하고 그리워한다.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내 손으로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기도 하고 그렇게 저렇게 거칠 것 없이 달려가서 안겨볼 수 있는 그런 바이칼호수를.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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