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메스티아 걷기우리는 산맥의 바로 아래 까지 온 셈이었다. 이 산맥을 넘으면 곧바로 러시아로 이어진다. 코카서스라고 불리는 넓고 긴 산맥. 누군가에게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기도 하는 산맥. 조지아는 코카서스 산맥을 따라 바로 아래 이어진 나라였다. 유럽의 끝, 아시아의 시작. 혹은 아시아의 끝, 유럽의 시작. 혹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불투명한 경계 그 자체를 보여주는 땅. 조지아의 서쪽으로 들어온 진과 나는 동쪽의 수도 트빌리시로 향하기 전 우선 서북쪽의 메스티아부터 들렸다. 거의 반나절쯤 걸려서 도착한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쥴리는 파양된 토끼다. 나이는 한 살, 동화책에 나오는 피터레빗을 닮았다. 토끼라면 응당 그러하듯, 쫑긋한 귀와 실룩이는 귀여운 코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몸값이 비싼 토끼는 아니다. ‘롭 토끼’처럼 밑으로 축 처진 커다란 귀를 가진 독특한 외모도 아니고 판다처럼 투톤컬러 무늬를 가진 ‘더치토끼’도 아닌 그냥 평범한 집토끼다. 이미 우리 집에는 커다란 개 두 마리와 고양이 세 마리가 있던 터라 토끼까지 키우는 건 결사반대였다. 하지만 아들은, 갈 곳 없는 토끼를 집으로 데려왔고 어쩔 수 없이 거실에 울타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당신은 택시를 믿으시나요?택시는 종교일까. 진은 택시를 믿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때로는 믿을 수 없는 게 택시 기사인데 어떻게 외국에서 택시 기사를 믿겠느냐고 진은 물었다. 내가 끄덕일 때 진은, 물론 좋은 택시 기사도 있겠지만 외국인인 우리가 그걸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구글맵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지도의 경로와 대중교통의 시간표에 대한 모든 정보가 구글에 있는 것은 아니기에, 택시 기사는 지나가는 여행자를 속이기 너무나 간단하다. 인천공항에서 줄지어 서 있는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새벽의 찬 기운이 아직은 낮게 깔린 이른 아침이었다. 게다가 한가롭고 평온한 일요일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도 없고 학교 갈 사람도 없으니 그야말로 해가 중천에 도착할 때쯤이나 일어나도 된다. 누룽지를 한소끔 끓여서 멸치 볶음과 함께 늦은 아점을 먹고 잠시 멍을 때릴 것이다. 밀려 있는 빨래들은 세탁기를 두어 번 돌리면 될 것이고 새내기 MT를 떠난 아들이 돌아 올 때를 기다리며 간단한 청소를 하고 저녁을 준비하면 그럭저럭 보람찬 일요일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 하루를 위해서 치열한 평일을 보내지 않았던가.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 나의 근본 없는 패션과 질서 없는 옷 생활을 개선하고 정리하려고 애쓴 지가 꽤 되었다. 나름의 변화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개선 속도가 느려서 답답한 것도 사실이다. ‘입었을 때 활동하기 편하고 내 몸이 쾌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옷’이라는 조건에 나의 심미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색상과 핏을 적용한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정말 쉽지 않았다. ‘옷 입기’라고 말로 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옷’이라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흑해 수영진은 수영을 좋아했다.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고 싶어 했고, 바닷가에 가면 해수욕장을 먼저 찾았다. 그가 부산 사람이라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은 분명히 수영을 잘했고 또 해수욕장에 어울리는 적절하게 탄 얼굴과 탄탄한 근육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지중해에 면한 터키 남부의 도시 안탈리아의 해수욕장에서 그와 함께 홍합에 밥을 채운 터키 음식을 먹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레드불에서 협찬 받은 시뻘건 파라솔 아래에 누워 나는 생각을 하는 척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는 바다로 뛰어들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주말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동네 산책이나 해볼까 싶어 나선 길이었다. 아파트 재활용하는 곳을 지나려는데 멀쩡한 1인용 소파가 거기 놓여있었다. 아마도 누군가 이사 가며 버리고 간 모양이었다. 어디 하나 뜯어진 데도 없는 멀쩡한 걸 왜 버리고 갔나 싶어 한참을 요리조리 살펴보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재활용 하는 데 있지, 거기로 지금 빨리 나와.”잠시 뒤, 왜? 뭔데? 하는 표정으로 나타난 남편이 재활용 딱지가 붙은 소파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그만해라, 안 된다.”“왜? 멀쩡한데 아깝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조지아, 그루지야누군가에게 조지아를 다녀왔다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거기 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커피 많이 먹고 왔냐고 말했다. 아마 대부분 미국의 조지아 주를 떠올렸을 것이다. 편의점에서도 만나게 되는 조지아 커피가 아닌가. 몇 해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거기, 커피 진짜 맛있어? 사실 여행 전에 내가 조지아에 대해 알고 있던 건 아무것도 없었고, 언젠가 그 나라에 가보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렴풋한 나라였다. 조지아의 예전 이름은 그루지야다. 그루지야라면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내가 작은 꼬마였을 때 우리 집에는 오래된 책 전집이 하나 있었다. 아마 어머니가 결혼 전에 구입하신 책이었을 것이다. 백과사전처럼 키가 좀 컸던 그 책들은 권마다 주제가 달랐는데, 요리와 테이블 매너, 뜨개질과 바느질 같은 내용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결혼한 여성에게 필요한 지식들이라고 당시에 생각했던 것을 모아놓은 전집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 책을 번역한 책이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내 기억이 분명하지가 않은 것은 나는 그중에서 요리책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 요리책이 어린 내게 특별했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그들의 소식그리운 사람들의 소식을 이런 방식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인터넷을 무심코 두리번거리다 만난 무서운 뉴스를 보며 당신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는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다. 터키 남동부에서 큰 지진이 났다는 소식에 나는 당신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동부, 남동부 어디에서 지진이 났다는 거지. 황급히 찾아본 뉴스 기사에는 지진이 가지안테프라는 도시 근처에서 발생했다고 했다.거의 100년 만에 발생한 이 지역의 대규모 지진이었다. 이 지역이 대륙의 판이 만나는, 지진지대라는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책 한 권을 이렇게 오래 읽어보긴 처음이다.일단 잡았다 하면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삼 일정도면 책 한 권을 읽는다. 재미있는 책일수록 읽는 시간이 짧게 걸린다. 읽다가 재미없으면 나중에 읽어야지.. 하다가 잊어버린다. 그런 내가, 반수연 작가의 에세이 를 2주일에 걸쳐 읽었다. 그녀가 2021년에 쓴 이라는 소설을 누구보다 재미있게 읽었던 나였기에 이번 책 또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왜 책 한 권 읽는데 2주일이나 걸렸냐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이렇다.“책을 읽을 시간이 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아직 닿지 않은 나의 목소리튀르키예 동부 끝을 함께 여행했던 중국인 여자애 단은 재빠르게 국경으로 떠났다. 튀르키예에 머물 수 있는 비자가 딱 하루 남았기 때문에 서둘러 다른 국가로 빠져 나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비자 기간을 초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랐지만, 단은 서둘러 떠났던 것 같다. 추정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와 나누었던 마지막 인사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과, 함께 걸으며 했던 이야기는 또렷이 생각나는데, 마지막이 기억나지 않는다. 숙소에서 헤어졌었나,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중학생 때였는지, 고등학생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어교과서에서 처음 접한 이 글귀는 미국 속담이다. 학창시절이 아득하고도 먼 옛날이라 영어로 된 문장은 잊어버려서 번역기를 돌렸더니 이렇게 나온다. ‘Don’t look a gift horse in the mouth.’비록 영어 문장은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이 글귀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동물의 입속을 들추어서 그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굉장히 해괴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동물을 선물로 주고받는다는 것도 낯선 이야기였다. 간혹 집에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아니, 아니어느 순간, 나는 와보리라고 상상하지도 않았던 거대한 고대 도시의 유적을 걷고 있었다. 무려 1000년 전에 세워진 도시였고, 멸망한 지 700년이 지난 도시였다. 안쪽에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부서져 있었지만, 도시의 넓은 터를 가늠하게 하는 무너진 건물들이 비교적 군데군데 남아 있어, 원래 이 도시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왁자지껄하게 드나들었을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도시의 이름은 아니(Ani)였다. 영어를 병기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은 이름을 가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나는 그동안 많은 요리책을 보면서 다양한 레시피를 접해왔다. 하지만 사실 내가 가장 많이 수집한 레시피는 사실 우리 어머니의 레시피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맛이고 좋아하는 맛이고 또 나도 집에서 재현해 볼 수 있는 맛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서 큰 이득을 보고 있다. 그날 어머니가 해 주신 어떤 반찬이나 요리가 맛있으면 바로 바로 만드는 법을 여쭤봐서 꾸준히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만의 요리 노트에는 무엇보다 우리 엄마의 레시피가 가득하다.문득 기억나는 일화가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반 떠나기터키 최동단의 도시 반(van)에서 진과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생각했다. 반에서 여행을 함께 했던 지크란은 그 도시에서 쳐야할 시험을 끝마치고 돌아갔다. 특수장애 학생들을 돕는 일종의 임용고사라고 했는데, 지크란은 맨처음에는 자신의 미래를 걸고 보는 시험에 퍽 긴장한 눈치였지만, 시험을 보고 나서는 헛헛해했다. 시험이 채 5분도 되지 않았다며 지크란은 어이없이 웃었다. 이러려면 이 먼 곳까지 나를 불렀을 필요가 있을까. 지크란은 우리에게 물었고, 그래도 우리를 만나서 즐거웠지 않았냐고 하던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두 달 전부터 잡지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곳에서 내가 처음으로 맡게 된 꼭지는, 동네의 ‘작은 책방’을 찾아가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 내가 사는 곳이 수원인지라 가까운 곳부터 찾다보니 이라는 독특한 책방을 알게 됐다.수원의 구시가지에 자리한 낡은 벽돌 건물의 2층 계단을 오르면 아기자기한 소품과 사진들로 꾸며진 복도가 나오고 그곳에 네 개의 초록색 문이 놓여 있었다. 마치,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중에 제일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204호 문을 열고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방학을 맞아 집에서 하릴없이 뒹굴 거리던 딸아이가 어느 날 뜬금없이 한 마디 던진다.“엄마, 외할머니 뵈러 안 가?”여느 대학생들처럼 알바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을 만나러 바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공 학업에 매진하는 것 같지도 않고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는 것이 내심 한심해 보였는데 가끔은 저렇게 입바른 소리를 툭 던질 때는 나보다 낫구나 싶기도 하다.엄마를 면회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자가진단키트를 준비해 가서 검사를 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있다. 물론 요양원에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오마르의 폭스바겐오마르의 폭스바겐은 결국 우리 앞에 섰다. 반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호기롭게 진과 나와 지크란을 태우고 호수와 도시를 둘러보게 해주겠다던 오마르는, 우리의 연락에 못 나가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는 정 필요하면 자기 대신 친구 한 명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진과 내가 전해주는 오마르의 태도에 화가 났는지, 지크란은 그 자리에서 당장 오마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도 버스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도 지크란은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화로 오마르에게 퍼부었다. 어떻게 약속을 이런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지난해 나는 많은 옷을 샀다. 솔직히 말하면 그 옷들은 그저 내 옷장에서 적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직 정리는 제대로 안 되어 있다. 그 어정쩡한 상태의 옷장은 이제 막 ‘패션 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한 내가 옷들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막상 옷을 잘 입으려고 하니 어떤 옷이 필요한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이 옷은 어떻게 빨아야 하는지, 어떻게 넣어두어야 편한지 등등 그야말로 생각해야 할 것 투성이었다. ‘어쩜 세상에 쉬운 게 단 하나도 없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