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화성(華城)
다산과 화성(華城)
  • 박석무
  • 승인 2019.12.1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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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수원은 경기도의 도청소재지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큰 도시입니다. 그런 수원에는 유명한 유적도 많고 역사적 기념물들이 즐비하지만 그 모든 것 중에서도 특별히 유명한 것은 ‘화성’이라는 아름답고 견고한 성(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들이 감탄하는 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은 조선의 정조임금과 다산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국보급 문화재입니다.

1792년 음력 4월 9일 진주목사(晉州牧使)로 근무하던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근무지 현장에서 별세합니다. 그해 5월 다산 형제들은 진주로 달려가 충주(忠州)의 하담 선영으로 목사공을 반장(返葬)합니다. 장사를 마친 다산 형제들은 고향 마현(馬峴)으로 돌아와 곡하고 여막을 짓고 거처합니다. 아끼던 신하가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조는 경연의 신하들에게 장례는 제대로 치렀으며, 슬픔을 이기고 건강은 제대로 회복하였는가를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조는 다산에게 상중(喪中)이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폐할 수 없다면서 국가의 대역사인 수원성[華城] 의 규제(規制)를 지어 올리라는 하명(下命)을 내렸습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는 그때 임금이 내린 하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왜 다산에게 성제(城制)에 대한 글을 올리도록 했는가라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유년(1789)겨울 배다리를 놓은 역사(役事)에 정약용이 그 규제를 만들어 공(功)을 이루었으니, 그를 불러 집에서 성(城)의 규제를 만들어 바치게 하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산은 집상 중에, 여러 옛사람의 좋은 성제를 참고하고 훌륭한 제도만을 취하여 초루(譙樓)·적대(敵臺)·현안(懸眼)·오성지(五星池)등의 여러 법도를 조목조목 나누어 정리하여 바쳤습니다.

성제를 바치자, 임금은 또『도서집성』과『기기도설』을 내려주면서 인중(引重)과 기중(起重)의 법을 강(講)하라고 명하자, 다산은「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이라는 기중기·거중기 등의 사용법까지 올려바쳤습니다. 그런 사용법에 의해서 활차(滑車)와 고륜(鼓輪)이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잘도 옮겨놓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도르래의 원리, 지렛대의 원리를 통해 제작된 기중기(起重機)와 같은 것으로, 인력은 적게 들고 큰 공역을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을 쌓는 일이 끝나자, 기쁨을 이기지 못한 임금이 다산에게 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기중기를 이용하여 경비 4만 냥이나 절약되었다(幸用起重架 省費錢四萬兩矣)”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원의 화성은 다산의 지혜와 능력이 발휘되어 완성된 성입니다. 애초에는 10년을 공기(工期)로 잡았으나 기계의 활용으로 2년 9개월에 완성되었으니, 이 또한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당시 일부 신하들은 경비가 과다하고 오래도록 공사를 하다보면 백성들의 피해가 크다고 반대 의견을 제시했지만, 다산의 공으로 빠른 공사, 작은 비용으로 마쳤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경기도, 수원, 화성 역시 다산을 말하지 않고는 거론하기 어려운 곳들임을 이런데서 알게 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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