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서울=박석무] 옛날의 인물에 대한 이력을 밝히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서 반드시 옳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기억에는 착오가 있을 수도 있고, 기록하다보면 글자를 잘못 쓰기도 하고 빠진 글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 자료를 검토하여 어떤 것이 옳고 타당한 기록인가를 확인하여 사실을 알아내야 합니다. 나는 수년 전에 『다산 정약용 평전』(민음사, 2014)이라는 책을 간행했습니다. 그 책을 읽은 독자 한분(고등학교 교사)이 참으로 꼼꼼히 읽고 많은 오자를 발견해 지적해주고, 또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의 학문을 깊이 들여다보면, 역시 창의력이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유교를 국가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사서육경(四書六經)이 가장 중요한 교과서였습니다. 다산은 육경사서에 대한 해석이 올바르지 못해서 2천 년 긴 밤[長夜]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면서, 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그렇게 크게 강조하였습니다. “경전의 뜻이 밝혀진 뒤라야 도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도를 얻은 뒤라야 비로소 심술(心術)이 바르게 되고, 심술이 바르게 된 뒤에야 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경학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정수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큰 꿈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나의 큰 꿈(大夢)은 대부분 성호(星湖)선생을 사숙(私淑)하는 가운데 깨달아졌다.”(余之大夢, 多從星湖私淑中, 覺來. : 年譜)라고 말해 요순시대의 복원을 위해 일생동안 학문을 연구했던 성호의 유저를 읽으면서 자신의 큰 꿈이 세워졌노라고 말했습니다. 다산은 16세에 성호의 유저를 읽었노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내 나이 스무 살 때에는 우주간의 모든 일을 다 깨닫고 그 이치를 완전히 정리해내려 했다. 서른, 마흔 살이 되어서도 그런 의지가 쇠약해지지 않았다.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을 공부하다 보면 대단한 다산의 시문학(詩文學)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난번 홍성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다 다산이 외직으로 근무했던 금정역이 있던 곳을 방문했노라는 내용을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여유당전서』의 시문집을 읽으며, 금정도찰방으로 근무했던 5개월 동안 그곳에서 지었던 다산의 시를 살펴보니 60여 수가 훨씬 넘는 많은 시가 보입니다. 연작시가 많아 60편이 실제로는 100수가 훨씬 넘을 정도입니다.청양·보령·홍성 등 그 지방의 아름다운 강과 산에 대한 시가 많고, 명승지의 누각이나
[위클리서울=박석무] 벼슬에는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이 있습니다. 중앙에서 근무하느냐 지방에서 근무하느냐의 차이입니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다산은 38세까지 10여 년 벼슬살이 하는데, 암행어사 아니고는 황해도 곡산도호부사라는 목민관 생활과 홍주목에 있던 금정도 찰방이라는 종6품의 외직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1795년 34세의 7월에서 12월까지 5개월 동안 말만 좌천이지 실제로는 유배에 가까운 지방 생활을 했습니다. 그해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천주교를 전파하자 나라가 온통 야단법석이었는데, 한때 천주교에 관여
[위클리서울=박석무]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제 우리나라는 ‘막말’ 천국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몸에 오물이 묻어 있는데, 그것은 보지 못하고, 남의 조그마한 실수에는 들을 수 없는 막말로 질타만 하고 있으니 어떤 이유로 세상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도저히 상대하여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경우, 그런 사람과 말을 건네면 자신의 말만 날아가 버린다고, 공자께서도 경계해준 바가 있습니다. “함께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데도 말을 한다면 말만 잃어버린다.(不可與言而 與之言失言.「위령공」)”라고 했는데, 앞뒤 가리지 않고 가장
[위클리서울=박석무] ‘가난해도 걱정일랑 말아라’라는 「풀어쓰는 다산이야기」가 전달되자 “가진 자들 즉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어려운 사회와 이웃을 위해 모범적인 행동을 벌일 수 있도록 사회운동을 벌여달라”는 글을 어떤 분이 보내왔습니다. “이사장님의 글 많은 공감이 가서 시의적절한 글”이라고 평하면서 “다수의 국민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안중에 없는 정치인, 사회적 리더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비통한 마음을 느낀다.”면서 “이런 시기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가진 자들이 베풀 수 있는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한
[위클리서울=박석무] 세상 모든 사람의 가장 큰 꿈은 부귀(富貴), 곧 부자가 되고 귀한 벼슬아치가 되는 일입니다. 옛날과는 다른 자본주의 시대가 극점으로 가면서, 만인의 욕구는 바로 부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좋은 부자이지만, 서양의 성인 예수는 “부자가 천당에 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라고 말하여 부자는 결코 천당에 갈 수 없다는 높은 교훈을 가르쳐주었으니, 믿어야 될 이야기일까요. 동양의 성인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도를 걱정해야지 가난을 걱정해서는 안된다(君子憂道不憂貧)”라고 말했습니다.
[위클리서울=박석무]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중등학교 학생이 제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학교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어보았다면서, 글이 어려워 알아볼 수 없는 내용이 많았지만, 다산이 두 아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가 많았고, 책을 많이 읽으라하며,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읽으라는 글이 있었다면서, 그런 편지를 받아 읽으면서 자란 두 아들은 뒤에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는가를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들들의 답장은 전해지지 않아, 일방적인 아버지의 편지만 열거된 책이어서, 그런 궁금증을 지님
[위클리서울=박석무] (····) 산천은 변해 바뀔지라도 河山有遷變 당파 짓는 나쁜 버릇 깨부술 날이 없구려 朋淫破無日 한 사람이 모함하면 一夫作射工 뭇 입들이 차례로 전파하네 衆喙遞傳驛 간사한 사람들이 세력 잡았으니 詖邪旣得志 정직한 사람 어느 곳에 둥지 틀랴 正直安所宅 (····) 「고의(古意)」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당쟁의 불길이 솟아오른 세상을 간파한 다산은 질곡으로 빠져들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면서, 당파싸움에 희생을 면하지 못할 불행한 미래에 불안을 떨굴 수 없던 마음을 시로 읊었습니다.조선시대의 당쟁은 참으
[위클리서울=박석무]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석권하면서 이제는 글쓰고 창작하는 일에 일대 변화가 와야 한다는 기대를 품은 글을 썼던 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학가나 예술인들, 이제는 남의 예술 모방이나 남의 문화모방에서 벗어나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우리 것인 문화에 마음을 기울이라는 염원이 담긴 글이었습니다. ‘기생충’이 바로 그런 영화여서 그만한 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 쓴 글이었습니다. 200년 전의 다산은 이미 그런 생각으로 글을 쓰고 창작을 했다는 증거까지 예시하기도 했습니다. 그 문제에 대
[위클리서울=박석무] ‘로고스서원’이라는 카페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 있어 읽어보았습니다. 제목은「‘효제’와 성경-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라는 글인데, 식견이 넓고 깔끔하게 글을 쓰는 분이어서 마음에 와 닿는 글이었습니다. 글은 성인(聖人)이 따로 없다는 전제 아래 시작됩니다.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면 누구나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 보다. 멀리는 어거스틴(Auqustin)이 그랬고, 가까이 C.S루이스(C.S, Lewis)에게도 이러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는 것은 알 수 없는 은혜이지만 합리적
[위클리서울=박석무] 지봉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사람이 알아야 할 온갖 지혜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 책의「인물부(人物部)」에는 ‘염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염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명리(名利)에 욕심이 없어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남을 뜻한다고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은 벼슬이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인데,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이익을 취하는데 급급하지 않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이 분명합니다.이수광은 그 항목
[위클리서울=박석무]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참으로 아름다운 스토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백인 경찰들이 흑인의 목을 짓눌러 사망케 했던 일 때문에 미국이 온통 시위 군중으로 가득 찬 나라가 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폭동으로 변하고 파괴와 방화로, 또 약탈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기사와 함께 실린, “폭동에 찢긴 美 韓人 가게, 기적이 꽃피다.”라는 제목의 기사(워싱턴, CBS노컷뉴스 권민철 특파원:2020.06.04.)에 세상에 그런 아름다운 일이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위클리서울=박석무] 아무리 냉철하고 이지적인 학자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따뜻한 인정이 서려 있기 마련입니다. 다산처럼 비판적이고 굳은 이성(理性)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많은 글을 보면 인간미가 철철 흐르는 대목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그가 귀양 살던 오랜 기간에 고향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엄한 스승의 모습도 많이 보이지만, 편지의 내면에 흐르는 다산의 인정미와 자식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숨길 수 없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젊은 큰 형수의 돌봄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다산은 큰형수의 무덤에 넣은 ‘묘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의 저서 500여 권을 살피다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主題)는 왕도정치, 바로 요순시대의 정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죽음의 함정에서 겨우 빠져나와 모진 유배살이를 하느라, 다시는 정계에 복귀하여 요순정치를 실현할 정책을 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꿈꾸고 바라던 바는 요순정치였습니다. 경전(經傳)의 뜻을 바르게 해석해야만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면서, 사서육경(四書六經)에 대한 새로운 주석서 232권을 저술했고, 천하국가를 경륜하려면 일표이서(一表二書)의 경세서가 있어야 한다고『경세유표』『
[위클리서울=박석무] 이원익(1547-1634)은 그의 호가 오리(梧里)여서 흔히 오리정승으로 세상에서 일컬었습니다. 1564년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자 영의정 이준경의 사랑을 받았고 1569년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자 서애 유성룡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뒤에 황해도 도사로 부임하자 당시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율곡 이이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의 벼슬살이로 옮기면서 승승장구로 벼슬길이 열렸습니다. 그때 조선의 조정에는 분당의 조짐이 있어 이준경·유성룡·이이 등은 조금씩 진영논리가 다르던 때인데, 이원익은 파가 다른
[위클리서울=박석무] 신의(信義)라는 단어는 인간의 윤리에서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두보 같은 시성(詩聖)도 그의 시에서 신의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저버린다는 탄식을 읊은 바 있습니다. 동양사상에서 친구끼리 믿음과 의리를 지키는 일은 오륜(五倫)의 하나로 그 값과 가치가 매우 높게 여겼던 것도 한 번쯤 생각해볼 일입니다. 진영논리로, 당파싸움으로, 정쟁으로 싸우지 않는 날이 없는 요즘으로 보면 도의(道義)로 친구를 사귀는 일이 얼마나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만들어주는 일인가를 바로 짐작하게 해줍니다.서양에서 도의로 친구를 사귀었
[위클리서울=박석무]음절에 맞추어서 사뿐사뿐 종종걸음 纖纖細步應疏節망설이듯 가서는 기쁜 듯 돌아와서 去如怊悵來如喜나는 선녀처럼 너울너울 앉으니 翩然下坐若飛仙발아래 곱디고운 가을 연꽃 피어나네 脚底閃閃生秋蓮19세의 청년 정약용이 경상도 진주에 가서 지은 “칼춤 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라는「무검편 증미인(舞劍篇贈美人)」시의 한 구절입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복사꽃 고운 뺨에
[위클리서울=박석무] 권력의 횡포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1801년의 신유옥사(辛酉獄事)는 천주교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건입니다. 진짜 천주교인의 죽음도 슬픈 일이지만, 가짜뉴스에 근거하여 죽임을 당한 억울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억울한 사람의 대표자야 당연히 정약전·정약용 형제지만, 그래도 그들은 옥사(獄死)는 당하지 않았습니다. 다산이 꼽은 대표적인 억울한 죽음으로는 녹암 권철신(權哲身:1736~1801)과 정헌 이가환(1742~1801)이었습니다. 다산이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평생의 작업으로 자신의 일대기인 「자찬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