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괴레메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자전거는 빠르다

처음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달렸을 때는, 마냥 신나 있었다. 드넓은 괴레메 주변 지형들을 걸어서 구경하기는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버스가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스쿠터나 ATV를 빌려 타고 싶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 투어를 신청해 다니기에도 약간은 부담스러운 가격이었고, 역시 돈이 없으면 몸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진과 나는 자전거를 빌렸다. 몸으로 구르면 돈을 아낄 수 있다. 길게 여행을 다닐수록 자꾸 아끼는 법만 늘어갔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사 투어가 들리곤 하는 포인트들을 직접 다녀오기로 했다. 그래도 20단 기어가 되는 나름 좋은 자전거였고,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차우신 동굴 마을까지 우선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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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신이 날 수 없었다. 마을부터 차우신 마을까지 거의 일직선의 도로로 이어지는데,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평지에 가까웠고 힘들이지 않고서 자전거는 금세 나아갔다. 아침이라 차들도 거의 없어서 도로를 독차지하며 달렸다. 여행 중에 ‘지금 여행 중’이라는 자각을 가장 크게 하는 순간은 바로, 어딘가로 달려갈 때다. 여행 중인데 진짜 여행 중인 기분. 바람을 가르고… 속도를 즐기고… 풍경을 지나쳐가며 낯선 곳에 있다는 즐거움을 마음껏 느낀다. 어쩌면 가장 순수한 즐거움에 가까운 것 같다. 놀이공원에서 즐거워하는 마음과 비슷하니까. 다만 그때는 몰랐다. 왜 그렇게 자전거가 잘 나갔는지. 그 도로는 평지도 아니고, 사실상 내리막길이었다는 것을. 내리막길을 즐긴 사람은, 오르막길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진과 나는 기암괴석들 사이의 쭉쭉 뻗은 도로를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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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신 마을은 거의 닫혀 있었다. 거대한 바위벽에 사람 살던 동굴들이 꽤 보였는데, 들어가는 입구는 닫혀 있었다. 고개를 빼고 건너보려고 해도, 동굴 이상의 것들은 보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가야 마을 다운 마을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마도 휴무인 모양이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공연히 진과 바위벽을 올랐고, 까칠까칠한 관목에 다리가 찔려가면서 벽 위에 올랐다. 펼쳐진 풍경. 바위 하나 다음 바위 하나 다음 다시 바위. 뗀석기 모양으로 이어진 바위들. 원래 올라가라고 있는 바위벽은 아니었으므로 잠시 둘러보다 바로 내려왔다. 내려오니 한국에서 성지순례 온 중년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고, 우리는 답했다.

- 위에 올라가면 뭐가 보이나?

- 오로지 바위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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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고난

차우신 마을을 지나 우리가 자전거를 이끌고 ‘요정의 굴뚝’으로 향하고 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몰려 오는 게 보이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요정의 굴뚝까지 가려면 30분은 족히 더 가야했고, 더 이상 평지도, 내리막길도 아니었다. 비를 맞으며 점차 가팔라지는 도로를, 대형트럭들이 무심히 지나가기도 하는 도로를 낑낑대며 탔다. 스쿠터를 빌렸다면 낭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빗속의 드라이빙… 땀을 뻘뻘내며 이게 땀인지 비인지 모르게 계속 페달을 굴렀다. 계속 가다가 도로 오른쪽 밭 사이에 작은 오두막 같은 건물이 있었다. 밭의 주인이 잠시 들리려고 만들어 놓은 공간인 듯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일단 자전거를 앞에 세워두고 들어갔다. 헬로우? 계세요? 해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고, 비닐로 슬쩍슬쩍 막아놓은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있었다. 진과 나는 의자에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완전히 먿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줄어들 걸 기대하면서 기다렸다. 어린 시절 논밭의 오두막에서 소나기를 피하는 기분으로, 지붕에는 빗소리 계속 투둑투둑 울리고, 우리가 지금 터키 한복판에서 비에 젖어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며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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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정말로 멎었다. 빠르게 왔던 것처럼 빠르게 그쳤다. 기다리면 그친다는 게, 어떤 좋은 기분을 주었고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겨우 도착한 요정의 굴뚝은 분명 특이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사실 카파도키아 대부분의 지형이 비슷한 기암괴석 모양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특이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윗부분이 버섯처럼 둥근 키 큰 암석들이 아기자기하게 늘어서 있다는 정도? 요정의 굴뚝, 이라고 하니 괜히 스머프를 떠올렸고, 스머프들이 돌무더기 사이사이를 기웃거리는 장면을 떠올렸다. 외계인이 있어도, 요정이 있어도, 숨어든 기독교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역사의 한복판인 아나톨리아의 한복판에 있는 카파도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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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이끌고 돌아오는 길은 더욱 고역이었다. 로즈밸리와 야외박물관에 들르려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는데, 올 때 시원시원하게 내려왔던 그 내리막길이 이제는 오르막길이었다. 나보다 체력이 좋은 진은 그래도 잘 나아갔는데 나는 거의 쥐가 날 정도로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 했다. 이미 한 번 비에 젖어 지친데다 힘도 없었다. 혼신의 힘으로 끙끙거리며 바위 사이로 난 길을 달렸다. 진과 너무 거리가 벌어지지 않기 위해 무지하게 애를 썼고, 도착했을 때쯤에 나는 이미 완전히 지쳐있었다. 로즈밸리에서 ATV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야외박물관의 동굴들에서 오래 전에 그려진 기독교 이콘들을 보았지만, 나는 카파도키아하면 자전거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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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벌룬

돌아와 숙소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진은 나보다 새벽에 뜰 벌룬을 더 기다리는 눈치였다. 꼭 벌룬을 타지 않아도, 수십 개의 벌룬이 한번에 뜬 풍경은 사실 어디서도 보기 힘들었다. 다만 여러 조건이 맞아야 뜰 수 있기에, 타는 것도 뜨는 걸 보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은 뜨든 안 뜨든 일단 새벽에 나가볼 거라고 했고, 나는 혹시 뜨게 된다면 전화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잠들었다. 굳이 새벽에 일어나서 그걸 보러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사실 더 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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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에게 전화가 왔다. 상기된 목소리로, 곧 벌룬이 뜬다고. 수십 개의 벌룬이 뜰 준비를 하고 있으니 어서 일어나서 언덕을 올라오라고 했다. 기대도 안 했는데 정말 뜬다니까, 괜히 같이 상기된 마음으로, 후다닥 준비해서 언덕을 올랐다.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푸른 사람들이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자 보였다. 하나둘 떠오르는 벌룬이. 내 옆을 막 스치고 떠오르는 벌룬이. 하나둘 들어나더니 하늘을 빼곡히 채웠던 벌룬들이. 왜 어떤 것들은 단순히 모여 있기만 해도 감동을 주는 걸까? 왜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떤 장면들은 마음속에 오래 남는 걸까? 단지 여러 개의 벌룬이 떴을 뿐인데. 나는 머리도 감지 않아 뻗친 머리를 하고, 일출 속 유유히 떠다니는 벌룬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진이 보였고, 진과 나는 함께 앉아 그 풍선들을 오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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