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에스패란토어를 공부한다고 나다니던 시절에 얼굴을 익혔던 오랜 친구로부터 장문의 이메일이 날아왔다. 인문학이란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장르이니 국제적으로 놀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에스패란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친구였다. 이 사람과 내가 친구관계로 발전한 동기는 아마도 소설 쓰기의 즐거움이랄까 괴로움이랄까, 하여튼 좋아서 시작했지만 포로가 되고 말았다는 괴로운 자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나는 곧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창작은 배가 너무 고파서 안 되겠다는 이유로 그는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한편 가르치는 일을 겸하기 시작했고, 나는 배가 고플 때 굶지 않고 산딸기 한 알이라도 맛있게 따먹을 수 있는 시골 고향을 머릿속에 그리며 이삿짐을 싸버렸다.

 

ⓒ위클리서울/ 김현수 객원기자

내가 시골 생활을 시작한 이후 그와 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피시통신 ‘하이텔’과 ‘천리안’ 시절부터 일 년에 한두 차례 이메일을 교환하며 만나자, 만나자, 노래만 불렀을 뿐 이십여 년 세월이 훨씬 더 지난 오늘까지도 만나야 할 적실한 감정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친구라는 의식은 떨쳐내지 못하고 ‘생각이 나면 그 이름을 불러주세요’하는 노래처럼 가끔, 아주 가끔 이메일을 보내고, 받고 하는 것이었다.

“이재명은 결국 영웅의 반열에 들어선다고 봐야겠지?”

그는 평론가 특유의 각종 사례 제시와 분석, 해석을 거친 다음 그렇게 물음표 하나를 붙이는 방식의 결론을 짓고 있었다. 그런 의문부호가, 그런 분석이 너도 그렇게 보는구나 싶어서 반가웠다. 반가우면서도 우리는 아직 만날 필요가 없는 관계인 것이로구나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그날 중으로 답을 썼고, 마지막 문장은 역시 그 친구가 그려놓은 것과 똑같은 형태의 의문부호로 맺었다.

“바보들의 바보짓이 황당하게 극렬해져 간다는 건 글쎄 뭐, 초조와 불안 이상의 다른 해석은 붙여볼 수가 없겠지?”

바보와 영웅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이다. 신화와 역사 등 수많은 기록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영웅은 바보들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바보는 영웅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바보들 스스로 바보가 되어갔다는 점에서 대칭적인 관계는 아니다. 장자의 우화집에 등장하는 참새와 붕새 이야기는 아마도 그래서 인류의 영원한 고전이 되어 있는 것일 게다.

바보는 생리적이고 직접적이며 물질적인 것들을 중요시 한다. 영웅은 왜, 어떻게 같은 존재론적이고 추상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들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영웅은 눈앞의 바보들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고개나 끄덕거릴 뿐 그들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를 못 느끼지만, 바보들은 영웅의 그런 세계관 자체를 못 마땅해 하고 시기, 질투, 모함 같은 소비적인 에너지를 끊임없이 발산해서 작은 영웅을 더 큰 영웅으로 만든다는 의식도 없이 만들어 간다.

뭔가를 한다는 의식도 자각도 없이 뭔가를 한다는 거, 마약중독자와도 같은 이런 몰아의 상태는 불안과 초조를 그 원인으로 봐야한다고 심리학자들은 조언한다. 원인이야 무엇이건 그 사람 자신은 그 순간이 매우 행복할 것이다.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 같은 것도 느낄 것이다.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또 하나의 바보 집단이 준동하던 그날 그 시간 그곳의 상황을 나는 보고 있었다. 아니다. 보다 섬세하게 정직한 언어를 쓰기로 하자면 보면서도 못 보고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과 며칠 전의 혹한이 민망할 정도의 따뜻한 날씨 탓이었다고나 할까. 멀리로 가덕도 주변 바다가 보이는 매우 한가로운 풍경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마 내 영혼이 잠깐 소풍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정된 공식 행사가 무탈하게 끝나서 다들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긴장이 풀리면서 살짝 방심한 시간인 셈이었다. 기자와 카메라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나름 질서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 질서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이게 뭐지? 하고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 그 장면이 보였다. 민주당 대표 이재명의 머리가 뒤로 홱 젖혀짐과 동시에 입이 쩍 벌어지는 단말마의 그 장면, 하도 시끄러워서 비명소리가 실제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내 몸은 통째로 단말마의 비명을 느끼면서 부들부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이냐. 화면을 일단 멈춘 다음 되돌리기를 해서 다시 보았다. 이른바 레거시가 아닌 개인 방송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을 찾기는 어려웠다. 어렵지만 결국은 찾았다. 처음에는 분 단위, 나중에는 초 단위의 되돌리기를 몇 번이나 해서 찾아낸 그 상황은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한 사나이가 제법 큰 사이즈의 종이를 흔들어 보이면서 기자들 사이를 뚫고 맹렬하게 돌진한다. 민주당 대표 이재명과 사나이가 정면으로 마주서기까지의 시간은 글쎄, 일 초? 이 초? 아무튼 사나이는 아마 사인을 해 달라고 외치면서 돌진한 것 같았다. 거리에서의 사인에 익숙한 이재명이 필기도구를 찾는 자세를 취하는 바로 그 순간 사나이는 온 몸의 체중을 실어서 덮쳤다.

사나이의 손에 들린 제법 큰 사이즈의 종이는 그냥 종이가 아니라는 게 그 순간 드러났다. 평범한 지도첩 속에 비수를 감춰들고 와서 암살을 감행한 사마천의 역사서 ‘자객열전’에 묘사된 자객처럼, 그는 정확하게 이재명의 목을 겨냥하고 몸을 날려서 일단 성공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목은 급소 중에 급소라는 해부학적 지식을 명료하게 숙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그 장면은 암살을 테마로 다룬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전광석화 그 자체였다.

 

이재명 자전에세이 ⓒ위클리서울/ 위즈덤하우스

북한의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때 운영했다고 하는 특수부대 출신인가 싶었지만 그냥 평범한 하급 공무원 신분을 오랫동안 유지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과거 경력이야 무엇이건 사나이의 그런 행동은 아무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다수의 군중이 운집한 속에서 민첩하게 몸을 날려 정확히 급소를 공격하는 그런 대범한 짓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상당 기간 연습 내지 훈련을 거친 사람에게나 가능할 것이었다. 그런 전문적인 훈련을 혼자서 수행해 왔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돌아보면 징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 사회가 온통 살해협박의 자유가 난무하는 아수라장 그 자체가 돼버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지도 오래였다. 대통령 문재인은 간첩이라고, 그래서 목을 따겠다고 공개석상에서 떠들어댄 사람이 나중에 국회의원을 하고 장관도 하는 세상이 됐다는 건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 목숨 따위 파리만도 못 하다는 인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두더지게임처럼 쑥쑥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른바 지도자급 인사들의 언행이 언제 누구에게 어떤 지도력을 미쳐서 어떻게 발현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치를 사익 추구의 장으로 파악해서 열심히 활용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교묘하게 잘 파고든다. 나중에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면 코미디도 그런 저급한 코미디가 없는 것으로 정리가 되긴 하지만, 정치란 곧 가족사업이라고 여기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미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지금 당장의 욕망 충족이 있을 뿐이다.

고속도로 옆 배수로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며 한 뭉치의 서류를 흔들어댄 뒤로 장관 자리에 앉은 사나이의 히스토리는 또 어떤가. 그 서류 뭉치 속에 이재명이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가 들어 있다고 외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성대하게 열어서 언론 종사자들을 무한히 바쁘고 기쁘게 해 주었지만, 대한민국은 신문이나 방송사의 ‘선전, 선동’을 신처럼 믿고 따라주는 ‘눈 먼 자들’의 나라가 이미 아니었다. ‘네티즌 수사대’라는 용어가 하나도 낯설지 않을 정도로 과거의 일방적인 언론 소비자들은 이제 언론의 주체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어떤 사람이 단시간에 떼돈을 벌었다고 자랑하며 인터넷에 수십 개의 돈다발을 공개했을 때 그것을 널리널리 퍼뜨리고자 애를 쓴 사람도 언론업계 종사자들이었다. 이재명을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직업 정치인이 맨 처음 그것을 발견해서 슬쩍 흘려봤을 뿐인데도 언론업계 종사자들은 이것이야말로 대박이다 하는 투로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눈에 척 봐도 엉터리라는 걸 알 수 있고, 그래서 ‘네티즌 수사대’가 무엇이 어떻게, 왜 엉터리인지 조목조목 밝혀냈지만 언론업계 종사자들은 단 한순간도 무안해 하지 않고 슬쩍 꼬리만 감추고 말았다.

이른바 국제마피아 조직이 성남시에서 활동하고 있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이재명이라는 황당한 ‘가짜뉴스’가 횡행했을 때도 그 시작과 과정, 끝은 같았다. 이재명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의 이익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직업정치인이 엉뚱한 사진 한 장을 발견해서 이것은 이것이다, 하고 외치면 언론업계 종사자들이 우우 몰려드는 그 일관된 패턴은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경탄스럽기도 하다.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단순무식하게 한 가지 생각만 할 수가 있지? 명색이 언론을 한다는 사람들은 또 어쩌면 그렇게도 충실하게 열심히 받아쓰기에 매진할 수가 있지? 하긴 그래서 ‘외눈박이’니 ‘눈 먼 자들’이니 하는 얘기도 나오는 것일 게다.

이재명은 언제인가 스스로를 돌멩이에 비유했었다. 이 사람도 걷어차고 저 사람도 걷어차는, 여기에 있으면 왜 여기에 있느냐고 걷어차고 저기에 있으면 또 왜 저기에 있느냐고 걷어차는 돌멩이. 그래서 그냥 소박하게, 평범하게 살고자 해도 안 된다는 탄식이었다.

완전 객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재명의 죄는 사실 커도 너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기본 사상이 억강부약 즉 힘이 너무 없는 사람에게는 힘을 실어주고, 힘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서는 힘을 살짝 빼야 한다는 것이니,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오직 하나 돈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돈벌이란 수단과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재명은 존재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어서 보이면 걷어차고, 보이지 않아도 걷어차야만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아주 역설적이게도 돌멩이는 걷어차임을 당하면 당할수록 단단해져 간다. 물리법칙상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다. ‘눈을 뜬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눈 먼’ 상태에서 자족하는 바보들은 자기들이 걷어차면 찰수록 이재명의 수명이 단축된다는 생각으로 헛된 발짓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내 친구는 내게 보내왔고, 나는 그 말에 적극 동의하기로 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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