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판 더!!!
한 판 더!!!
  • 김일경 기자
  • 승인 2019.10.22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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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다. 곡식도 무르익고 하늘은 한껏 높아졌다. 요즘은 세월이 좋아져서 사시사철 먹거리가 풍족하지만 예전에는 곡식이 열매를 맺는 가을이야 말로 먹을 게 넘쳐서 말(馬)도 살찌고 사람도 풍족하게 먹는 계절이 가을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을을 좋아했다. 낙엽이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이 좋았고 겨울을 준비하는 스산한 기운도 좋았다. 한 여름 뙤약볕에 지친 몸과 마음이 몇 개월 간 너그러워질 수 있는 계절이어서 좋았다. 대게 여자들은 봄이 오면 설레고 기분이 좋다는데 나는 봄보다 가을을 더 사랑한다. 아련한 짝사랑의 기억 때문일까.

중학교 때 가을 소풍을 간 적이 있었다. 어디로 갔는지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겠다. 졸졸 흐르는 개울가를 돌다리 위로 건너는데 간격이 조금 넓은 돌다리 위에서 어찌할 줄 몰라 쩔쩔 매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나타난 우리 학교 중년의 영어선생님이 내 팔을 잡아 주셨다. 그 당시 나는 중년의 영어 선생님을 무지하게 좋아하고 있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콧구멍을 간지럽힐 때였다. 돌다리가 구름다리가 되고 가슴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리고 얼굴을 홍당무가 되던 찬란하고 아름답던 시절이 가을이었다. 그 중년의 영어 선생님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는 환경파괴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짧아진 가을을 느낄 틈도 없이 행사준비에 바쁜 난타 선생님이 되어 버렸다. 수줍고 부끄럼 많던 조그만 여학생은 자글자글 주름을 감추려 화장을 덧칠하고 화려한 인공 눈썹을 붙이고 새빨간 립스틱으로 변장한 채 물을 튀기며 북을 치고 있으니 이 모습을 영어선생님이 보시면 어떤 표정일까?

짧은 가을의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그 날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어울림 한마당 축제가 있는 날이었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주말마다 각 주민센터에서는 각양각색의 이름을 내건 동네 축제가 한창이다. 우리 동네 한마당 축제에 난타 섭외를 받고 아침부터 짙은 화장을 필두로 공연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말이라 식구들이 모두 집에 있는 날이어서 밥하랴 화장하랴 정말 정신이 없었다. 더구나 이날은 우리 팀 코디님이 야심차게 준비한 빨간색 의상을 처음 입고 무대에 서는 날이라 의상과 화장을 맞추느라 더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장 중요한 음원을 챙기지 않고 집을 나설 뻔했다. 급히 컴퓨터를 켜고 USB를 꼽고 오늘 공연의 음원 세 곡을 담는데 평소에 한 번도 하지 않던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앵콜요청이 나올까?’ 가끔 공연을 하다가 앵콜요청이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에 맞춰 행사를 진행하다보면 관객의 앵콜요청을 못 받아 주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땐 시간이 돼도 앵콜곡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팀은 한 번도 앵콜을 소화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마법에 이끌린 사람처럼 혹은 조상님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예정되어있는 공연곡 외에 한 곡을 더 담았다. ‘혹시 모르니….’

현장에 도착하니 온 동네 아는 사람이 다 모였다. 한 20년 살아온 동네라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 정말 이게 잔치구나 싶을 정도로 한 자리 하시는 여러 어르신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래 층 아저씨, 심지어 잠시 알고 지냈던 학부모들도 한 자리에 모여 인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럴 땐 짙은 화장과 평범하지 않은 의상 덕택에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1부 순서인 체육대회와 점심시간이 끝나고 2부를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우리는 오프닝무대를 준비했다. 빨간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우리 팀의 컨셉인 산발적인 등장으로 처음 착용한 빨간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올랐다. 물 난타를 마무리로 예정된 세 곡의 공연을 마쳤다. 인사를 하고 내려오려는 찰나 조상님의 계시가 빛을 발했으니….

“한 판 더!! 한 판 더!! 한 판 더!!”

운동장 한 쪽에 마련된 부녀회 천막아래 음식을 준비하시던 주민 분들이 앞치마 차림으로 모여 박수를 쳐주시며 ‘한 판 더’를 외치고 있었다. 앵콜도 아니고 무려 한 판 더 라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음향 팀을 향해 마지막 곡을 요청했고 멤버들과 간단한 눈치를 주고받았다. 정말 이건 예정에 없었던 일이고 아침에 잠시 스쳐 지나갔던 생각이라 멤버들에게도 미처 전달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노련한 우리 팀은 갑자기 찾아 온 ‘한 판 더’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고 준비되지 않았던 공연을 시작했다. 모여 있던 주민들은 박수와 함성을 보냈고 어느 새 무대 앞으로 춤을 추시는 분까지 등장해 그야말로 관객과 함께 하는 즐거운 공연이 됐다. 무대가 끝나도 ‘한 판 더’의 함성은 계속 이어졌지만 우리는 내려올 줄도 아는 나름 프로이기에 감사함을 담은 인사를 했다. 아, 혼자만 생각하고 멤버들에게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음에도 한 판 더 무사히 해낸 우리 팀에겐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지역마다, 동네마다 축제나 행사가 참 많은 계절이다. 요즘 지자체에서는 지역 행사를 준비하면서 담당자가 직접 공연 팀을 섭외하거나 일정을 짜지 않고 공연 기획사에게 맡긴다고 한다. 그러면 기획사는 그 지역의 예술인들을 섭외하기 보다는 전문 공연 팀을 섭외해서 무대에 올리는데 문제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찾아보면 실력 있고 참신한 예술인들이 넘쳐난다. 그 지역의 전통행사에서 조차 지역 예술인들을 섭외하기 보단 기획사가 섭외한 타 지역의 전문 공연단이 참여하니 누구를 위한 지역 축제인지 의아할 때가 있다. 전문 공연단의 멋진 무대도 좋지만 지역 예술인들이 주민들과 함께 즐기는 축제야 말로 진정한 지역축제가 아닐까 싶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짧지만 강렬했던 한 판 더 의 추억은 다시 재현될 수 있을까? 우리는 또 다른 ‘한 판 더’를 위해 열심히 두드리고 연습할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찬란하고 아름답던 가을날처럼 이 멋진 계절에 어울리는 의상을 준비하신 우리 코디님, 공연을 함께 즐기며 멋진 춤 한 판을 보여준 이름 모를 주민분 그리고 ‘한 판 더’를 외쳐 잊지 못 할 추억을 만들게 해준 부녀회 주민들께 이 자리를 빌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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