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혼생활 분투기
나의 결혼생활 분투기
  • 김양미 기자
  • 승인 2020.12.10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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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23년 전 오늘. 나는 결혼을 했다.

시퍼런 땡감처럼 설익은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러니 뭔들 제대로 했을까. 엄마 보고 싶다고 자다 깨서 엉엉 울다가 오줌을 누고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친정은 서울인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전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남편은 여기저기 사람들 만나야 할 일이 잦았고 하루걸러 출장이었다. 오죽 심심하면 브라더 재봉틀을 사다놓고 행주 가장자리에다 레이스를 박아 붙였을까. 남편이 미운 날은 청바지 통을 바짝 줄여 쫄바지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겹기만 하던지….

남편이 퇴근해 집에 들어오면 졸졸 따라다니며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또 훌쩍 나가 버릴까봐 조마조마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나는 남편을 아빠처럼 의지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 아빠와 닮은 점이 많은 남자였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정도 헤펐다. 그래서 만나면 좋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고 그랬다. 기껏 해야 일주일에 몇 번 보지도 못하는 게 갈증이 났다. 만나봤자 또 금방 헤어져야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면 더 이상 헤어져 있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집에 남아 더 자주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뭐 그러다 아이가 태어났다. 그때부터 심심하기는커녕 밥숟가락이 코로 들어갈 정도로 정신없이 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애를 키우려니 참으로 막막했다. 열만 나도 나부터 울음을 터트렸고 장염에 걸려 묽은 변이라도 보는 날에는 똥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저귀를 붙들고 기도했다. 그러다 도저히 힘들어 못 살겠다 싶어 친정으로 들어가 엄마 곁에서 아이들을 2년 정도 키웠다. 그 무렵 남편도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

다행히 남편과 친정엄마는 사이가 무척 좋았다. 그런데 하루는. 한겨레신문인가에 이런 공모가 뜬 걸 봤다. 00그룹에서 주최하는 ‘처가 사랑 글쓰기 대회’ 뭐 이런 비슷한 거였다. 심심해서 그냥 응모해봤다. 내가 남편인 척 글을 썼다. 장모님 사랑해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게 덜컥 우수상에 뽑혀버렸다. 대상은 상금을 줬고 우수상에는 이걸 준다고 했다.

해외여행 상품권 300만 원짜리.

그냥 주면 될 것이지 인터뷰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기가 딱 찼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털어놨다. ‘이짜나…’ 이러면서. 남편은 노발대발하며 절대 못 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사기 친 게 들킬까봐 겁이 났던 나는 남편에게 내 글을 읽어주며 울었다.

“잘 들어봐. 여기 적힌 내용대로만 하면 된다고오….”

사실. 그 글은 진짜였다. 남편은 엄마에게 아들보다도 더 살갑게 구는 사위였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생선을 구워 엄마에게 밥상도 가끔 차려드리고 ‘옛날에 내가 말이네…’로 시작하는 엄마의 케케묵은 이야기도 잘 들어줬다. 그래서 그걸 내가 글로 썼던 건데 이 사단이 나버린 것이다. 아무튼 남편은 ‘내 알 바 아니고’라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터뷰 못 해!!”

나는 칼을 들이밀 수 없어 여행상품권으로 딜을 했다.

“이짜나… 이거 당신 어머니 아버지 여행 보내드리자. 해외여행 한번 못 나가보셨잖아, 응.”

결국 남편은 인터뷰에 응했고 시부모님은 동남아 일대로 여행을 다녀오셨다.

이 자리를 빌어 ○○그룹 관계자님들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제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은 사기행각이었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엄마 곁에 붙어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캐나다로 이민 갔던 작은언니 네가 돌아왔다. 캐나다는 너무 외로워서 살기 힘들다고 했다. 언니도 나도 외로운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아이 둘. 좋은 환경에서 키워보겠다고 마음 굳게 먹고 떠난 길이었지만 엄마도 형제자매도 없는 그곳에서는 도저히 정착하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잠시 머물다 가겠거니 생각했다. 이민을 가기 위해 그동안 들였던 노력과 돈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내 예상을 뒤엎고 엄마 집에 아예 눌러 앉아버렸다.

손녀 둘에 손자 둘. 아이들은 눈만 뜨면 제비처럼 입을 벌리고 먹이를 찾아댔고 메추리 새끼 마냥 우르르 몰려다니며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고 이제 좀 편하게 살아볼까 했던 엄마에겐 재앙이 따로 없었다. 참다못한 엄마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우리 둘 다 쫓아내버렸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그렇게 나는 또 혼자가 되었다.

물론, 애들도 있고 남편도 있었지만 엄마가 곁에 없으니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이가 열이 나거나 장염에 걸렸을 때, 그리고 벌레에 물려 살갗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을 때도 엄마가 ‘괜찮다’고 말해주면 마음이 놓였다. 따로 시장을 보지 않아도 밥숟가락만 얹으면 끼니가 해결됐으니 생활비도 거의 안 들었다. 엄마가 아이들을 산이며, 놀이터에 데려가줘서 나는 낮잠도 자고 책도 읽을 수 있었다. 그랬는데 이제 다시 혼자가 돼버린 거다. 그 무렵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단어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두 말 않고 이 걸 골랐을 거다.

독.박.육.아.

그렇게 나는 다시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남편은 여전히 바쁜 사람이었고 나는 여전히 미숙한 엄마였다. 직장이고 뭐가 다 때려치우고 시골 가서 농사짓고 같이 애들 키우며 살자고 남편에게 조르기도 했다. 진짜 그렇게 살면 행복할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은 철없는 아내의 투정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내가 남편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건 덜 외롭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런 기대 때문에 더 많이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런 환상을 품지 않았더라면… 좀 더 독립적이고 덜 의존적이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반성도 해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후회는 늘 지나간 다음에 오는 거고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을.

어쨌거나! 내 결혼 생활 분투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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