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 석 자 백선엽을 오랜만에 접하고 놀랐다. 그보다 먼저 소환된 이름 석 자 홍범도가 아니었다면 굳이 놀랄 이유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대륙 진출 소망이 이런 식으로 구체화되고 있구나 하는 인식이랄까 자각이랄까 뭐 그런 것들이 내 가슴을 거칠게 흔들어놓은 것일 뿐이었다.

죽은 이의 무덤을 파내서 한 번 더 죽이는 것을 역사는 부관참시라고 표현한다. 정치를 보다 큰 틀에서 하고자 하는 사람은 부관참시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호연지기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개인적인 복수심과 시기심, 질투심으로 부글부글 끓어대는 못난이들이 주로 부관참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역사는 우회적으로 말해준다.

 

ⓒ위클리서울/ 김현수 객원기자,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홍범도를 뽑아내고자 애쓰는 행위는 부관참시 급 발상에서 시작된 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못난이들의 개인적 시기심이나 복수심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보다 긴 안목의 정교한 계산이 작동되고 있다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느껴진다. 사회심리학적 분석 툴로 보았을 때 이 계산은 아마도, 어쩌면, 매우 과감하게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짐작컨대 홍범도 뽑아내기에 성공하면 이봉창과 윤봉길을 뽑아내고자 할 것이다. 이어서 안중근과 김구에 손을 대고자 할 것이고, 곧 이어 이순신을 뽑아낸 다음 선조를 찬양하고, 이완용 등 을사오적으로 기록된 이들의 명예회복을 추진해서 성공하면 그들을 구국의 영웅으로 묘사한 소설 같은 것들을 무더기로 쏟아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일부에서는 이미 한글은 일본어에 비해 조잡하다는 등 세종대왕마저 깎아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런데 왜?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전후좌우 맥락을 곰곰 따져보기로 하자면, 일본과 일본을 신처럼 받들고 추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무턱대고 그냥 일본을 찬양하고 그들의 대륙 진출을 도와주자는 식의 선동만 해서는 일제36년의 경험상 반발을 불러오기 십상이라는 걸 그들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의 행적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흥미진진하고, 희망과 절망과 탄식과 환호와 비명이 표창처럼 휙휙 날아다니는 혼돈의 도가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물론 내 개인적인 경험을 종합해서 분석했을 때 그렇다는 것일 뿐 객관적인 자료가 지금 공개돼 있는 건 아니다.

그리 선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홍범도와 백선엽은 거의 비슷한 시기인 철부지 소년 시절에 내 머릿속을 통과했다.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고 만화책을 통한 앎이었으니 주마간산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만화는 그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일단 접했다 하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고창의 양민 희생자 위령비
고창의 양민 희생자 위령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자신의 태어남이 곧 어머니의 사망 이유가 돼버려서 완전히 밑바닥 삶을 살아야 했던 홍범도는 뭐랄까, ‘전설따라 삼천리’ 급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독립운동까지 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신비감으로 가득한 인물로 내 기억에 새겨졌다. 간단히 말해서 비현실적인 인물이었던 셈이다.

반면 백선엽은 지금 바로 내 눈앞에서 공산당을 때려잡고 있는 것 같은 그림이 머릿속에서 막 그려질 정도의 생생한 현장감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간도특설대’라는 곳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에 매진했다는 등의 부정적인 정보는 당연히 만화책에 한 줄도 없었다. 따라서 어린 내 기억속의 백선엽은 맥아더 장군 이상으로 훌륭하고 늠름한, 대한민국이란 명칭의 나라를 존속 가능하게 만든 영웅 중에 영웅이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장군의 이미지가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한 것은 내가 초라한 고향을 탈출해서 화려한 서울특별시민으로 살고 있을 때였다. 그 시기의 어느 하루 매우 특이한 사진 한 장이 조간신문에 실렸다.

드넓은 학교 운동장에 이층 양옥 한 채가 사다리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운동장 바닥에서 이층 양옥까지는 높이가 십 미터에 가까웠고,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다리를 타고 어렵게 오르내려야 하는 참으로 희한한 구도였다.

그 내막이 기가 막혔다. 학교법인 선인학원에서 학교 부지를 대폭 확장할 목적으로 주변 민가들을 매입해 들이기 시작했는데 딱 한 집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집 주인이 다름 아닌 현역 장군이었다. 그 장군은 백선엽의 모든 활동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만 달랑 한 채 남겨놓고 좌우사방 모든 집들을 다 철거해 버린 것이었다.

대개의 교육기관은 그 학교의 건학이념에 따라 재단 이름을 짓지만, 선인학원은 특이하게도 백선엽 백인엽 두 형제의 이름을 따고 있어서 그 의도와 목적이 읽혀진다고나 할까, 하여튼 그리 썩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구국의 영웅이었던 사람이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학교를 수도 없이 장악하고 있으면서 ‘선인왕국’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것도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었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나온 거야? 하는 의문이 꼬리표처럼 남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학교 명칭은 하나같이 아들이나 딸 혹은 아내의 이름과 연동돼 있다.

그 뒤로 한참의 세월이 흘러 역사학자 서중석 등이 주도하는 ‘역사문제연구소’를 드나들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초기 활동이 주로 근현대사에 집중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독립운동사를 별책부록처럼 다루고 있어서, 그 행적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홍범도와 백선엽은 뭐랄까, 필수과목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위령비 건립 취지문
위령비 건립 취지문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청년장교 백선엽이 2년 동안 복무한 것으로 알려진 ‘간도특설대’는 명칭 그대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특별한 목적으로 설치한 특별 부대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사용하는 특수활동비와 같은 개념의 특별활동비로 조선인 밀정을 여지저기에 심어놓고 정보가 취합되면 급습해서 죽이거나 잡아다가 고문을 하고, 가족은 물론이요 일가친척에 친구들까지 쫓아다니며 아주 도륙을 내는 게 주된 임무이니 그야말로 특별한 부대인 셈이었다.

백선엽에 대한 나의 공부는 그 정도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희한하게도 그는 나를 따라다니면서 좀 더 공부해 보라고 채근한다는 느낌이었다. 고향을 탈출했던 내가 다시 화려한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소박한 고향으로 되돌아온 뒤의 어느 날이었다.

문화원 사무국장이 양민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에 참석한다고, 함께 가자해서 따라갔다가 백선엽의 그림자를 밟았다고 할까, 보았다고 할까, 하여튼 매우 크게 놀랐다. 육이오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사전지식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내 고향 고창에서도 그런 참상이 도처에서 있었다니 이게 뭔가 싶었던 거다.

알고 보니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까지 산을 끼고 있는 거의 모든 마을에서 살육 작전이 벌어졌다. 작전명은 ‘견벽청야’,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존재를 다 없애고 푸른 숲만 남게 한다는 그 끔찍한 작전을 수행한 부대의 사단장이 백선엽이었다. 물론 사단장이 직접 현장마다 돌아다니며 구체적인 방식까지 지휘하지는 않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최고 책임자였다는 점이다.

그날 위령비 제막식 현장에서 나온 수많은 증언 중에 특히 충격적인 것이 그 방식이었다. 어느 하루 국군들이 몰려와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라 했더란다. 저기 어디쯤에 지금 공산군이 몰려오고 있다고,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산속으로 들어가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더란다. 그래서 모두가 일제히 숨을 헐떡거리며 뒷산을 바라보며 뛰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수류탄이 터지고, 기관총이 난사되면서 정신없이 뛰고 있는 사람들을 픽픽 쓰러트렸다는 것이었다.

그런 끔찍한 증언을 한 사람은 당시 나이 아홉 살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를 앞에 세우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뛰고 있는데 동생을 업고 있던 어머니가 쓰러지고, 이어서 아버지가 뒤통수에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자신을 가슴에 안는 자세로 강하게 덮어 눌러준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때 그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들은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일부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며 없는 듯이 숨을 죽이고 살았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아마 자신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뭔가 국가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 과잉충성으로 스스로를 감추고 신분세탁을 하고자 노력한 사람이 군대에만 있었을까? 아니다. 사람이 있는 모든 곳에 그런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일제 강점기가 삼십육 년이라지만 왕비 살해 등 내정간섭 기간을 포함하면 최소 사십육 년이다. 사십육 년이라면 결혼해서 자식 낳고 다음 세대까지 볼 수 있는 기간이다.

 

위령비 안내판
위령비 안내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당당하게 주인 노릇을 하고자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버린 이들이 몸과 마음과 정신으로 구성된 사람이었듯이,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일제에 협력한 이들 또한 몸과 마음과 정신으로 구성된 사람이었다.

조금만 역지사지를 해서 보자면 일제에 적극 협혁한 사람과 그 후손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해볼 수 없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했을 수도 있다. 사람이란 세상 모든 것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의 기억까지 속일 수는 없게 돼있으니 말이다.

그런 엄청난 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 방식이 조국을 바꾸면 어떨까, 민족을 바꾸면 어떨까 하는 발상까지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의식적으로 조국을 바꾸고 민족을 바꾼다 해서 기억이 완전 탈색되어 편안해질 리 만무하겠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안간힘이라도 쓰지 않고서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대륙 진출을 소망해 온 일본 정치가들은 포인트를 제대로 잘 잡았던 셈이다. 부모로부터, 조상으로부터 안 종은 기억을 대물림해 온 사람들의 괴로움을 꾸준히 부추기고 흔들고 회유해서 마침내, 드디어, 일본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홍범도 등 민족주의자들을 뽑아내는 상황까지 만들어냈으니 이 얼마나 치밀한 작전이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감히 뭐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해도, 지진과 풍랑 등 지리적 여건에 더해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이라고 하는 인간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재앙까지 끌어안은 일본으로서는 대륙진출의 소망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을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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