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 픽사베이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곰이 사람을 자신의 식량으로 인식해서 공격했던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밤새 실랑이를 벌였다. 꿈속에서였다. 목소리로 미루어 상대가 사람이고, 남자인 건 분명했지만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나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사랑하는 사람이건 미워하는 사람이건 꿈에서 누군가 사람을 만나 구체적인 주제로 토론을 벌인 경험이 내게는 한 번도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경험이냐 하는 기분으로 문을 열어보니 거센 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렸다. 눈발은 엷은 커튼처럼 희끗희끗하기만 할 뿐 쌓이지는 않았다. 강원도 해안 나무들 사이에 늘어선 명태 덕장이 생각났다. 명태코다리가 먹고 싶어졌다. 까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야말로 갑자기, 명태코다리가 생각나면서 먹고 싶어졌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마침 장날이었다.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 이후 명태는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냥 시장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누군가 반갑다는 억양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는 순간 그는 벌써 내 옆으로 와 있었다. 불쑥 내미는 손을 얼결에 잡고 말았다. 손을 잡히고 난 뒤에서야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선거 때만 되면 당선 가능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출마 선언을 하는, 출마 선언 자체를 무기로 다른 후보들과 온갖 기기묘묘한 방식의 협상을 해서 돈벌이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두 손으로 내 한쪽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저 아래 단전으로부터 낭패와 모욕감이 밀물 듯이 몰려 왔지만 이미 늦었다.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책 ⓒ위클리서울/ 청어람미디어

그래도 아직 명태를 잊지는 않았다. 그것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 아마 잊었을 것이다. 구슬프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여리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한 거문고 산조가 듣고 싶었다. 거문고 산조를 끝도 없이 듣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잠에서 깬 것은 닭소리 때문이었다. 닭장을 뛰쳐나온 아랫집 암탉이 우리 집 마당에서 별별 짓을 다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늘밭을 파헤치고 있는 암탉의 짓거리를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자니 홀연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들린 게 아니라 들린다는 느낌이었겠지만 어쨌든 느낌이 생생했다. 바로 내 옆 가까이에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곰이 나를 자신의 식량으로 단정해서 덮친 것은 아니야. 난 알아.”

사실은 내 생각도 그와 별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외적인 상황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곰이 사람을 주식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배가 너무 고프면 먹을 목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의 그런 반론을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자기가 텐트를 친 자리가 마침 곰이 즐겨 다니는 산책로였고, 그래서 낯선 텐트를 발견한 곰이 이건 또 뭐냐 하고 앞발을 높이 들고 가볍게 한 번 탁, 쳐봤을 뿐인데 텐트의 특성상 폭삭 무너지면서 곰의 육중한 몸이 사람을 덮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는 거였다. 제법 커다란 물체가 발짓 한 번에 폭삭 무너지니까 곰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당황해서 그냥 덮어놓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대니까 자기는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다는 얘기였다.

곰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그의 마음 깊이가 엄청나구나 싶었다. 호랑이에 비하면 곰은 확실히 과묵한 철학자 스타일이어서 가까이하고 싶어지는 동물이기는 했다. 어쩌면 마늘 먹고 사람이 됐다는 신화의 영향인지도 모르긴 하지만, 언제 어떤 사진 속의 곰을 보더라도 경계심이나 적대감보다는 친근감이 먼저 일어나서 만져보고 싶어지는 동물이었다.

그는 곰이 좋아서 일본을 떠나 알레스카 사람이 되기로 했던 것일까? 아니면 사진을 찍을 목적으로 알레스카를 잠시 이용 내지 활용하기로 했던 것일까? 그에게 묻고 싶었다. 만약에 그가 살아 있어서 나의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도 두 가지 다 아니라고 할 것 같기는 했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 보이면서 형편없는 속물을 만났다는 불쾌감을 살짝 드러내 보일 것 같기도 했다.

그 이름 호시노 미치오, 그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소망하기 딱 좋은 나이 열일곱 살에 알레스카를 알았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목마르게 소망하는 그의 손에 어느 하루 낯선 잡지 한 권이 쥐어졌다. 잡지를 펼치자마자 그 사진이 보였다. 알레스카 해안 마을을 촬영한 항공사진이었다. 무슨 달나라인가 별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삭막하고 낯설었다. 그 삭막하고 낯선 풍경에 그는 곧 매료되고, 매혹되고, 빠져들었다.

 

호시노미치오의 사진책
호시노미치오의 사진책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무정하게도 편집자는 ‘알레스카 쉬스마레프’라는 지명 하나만 달랑 제목처럼 달아놓았을 뿐 설명이나 해설 한 줄 붙여놓지 않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찾아볼 수도 없었다. 몇날며칠이나 목마른 고민과 궁리를 거듭하던 소년은 무턱대고 편지 한 통을 썼다. 가보고 싶어 죽겠는데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서 너무 속상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그는 익숙하지도 않은 영어 단어를 찾아가며 더듬더듬 써서 보냈다. 받는 사람은 ‘알레스카 쉬스마레프 촌장님’이라고 써서 보내긴 했지만, 혹시, 혹시, 하는 동안 일 년 세월이 훌쩍 지났고,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접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기하게도 이 년이 채 안 된 어느 하루 답장이 왔다. 언제든지 오시라고, 언제라도 반갑게 맞이하겠다는 내용의 답신, 그것은 하늘나라 별나라 달나라에서 보내온 ‘여기도 사람이 있어’하는 메시지인 것만 같았다. 소년은 잠 못 이루는 낮밤을 몇 달이나 보낸 끝에 드디어 최소한의 경비를 마련해서 집을 나섰다.

호시노 미치오 스스로 밝힌 이런 스토리를 읽다 보면 그 나이쯤에 나는 뭘 했던가 싶어지면서 자존심이 뭉텅뭉텅 떨어져나간다. 자존심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 생기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요 외경심이요 신뢰감이다. 열일곱 살 나이의 소년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곳으로 편지를 보내고, 어디의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그 편지에 답을 보낸 사람이 있다는 거, 이만한 정도의 신뢰감이라면 사람 자격을 갖고 보람차게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싶어지면서 눈물이 벌컥 쏟아지던 것이었다.

내가 호시노 미치오를 알던 시기에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런 사람을 찾아내고자 해서 찾아낸 것도 아니었다. 나무꾼과 선녀의 고향 바이칼호수를 그리워하다 보니 자동적으로 시베리아 전체를 조망하게 되었고, 시베리아의 역사를 살피다 보니 또한 자동적으로 알레스카와 시베리아는 원래 붙어 있었다는 새삼스런 인식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을 때, 그때 어느 하루 마치 “알레스카 전문가 여기 있어” 하고 외치는 듯이 떠올라온 사람이 호시노 미치오 그 남자였다.

그 시기에 나는 내 이름을 ‘미친놈’으로 바꿔볼까, 하는 고민을 꽤나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이름 바꾸는 유행에 자극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친구 녀석 하나가 나만 보면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리며 피식피식 웃어대니 이게 뭐랄까,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자꾸 듣다보니 ‘미친놈’이란 소리가 그렇게도 정겨울 수가 없고, 마치 부모님이 지어주신 원래의 내 이름이었던 것처럼 여겨지던 것이었다.

내 입이 열리기만 하면 시베리아요, 바이칼호수요, 나무꾼과 선녀 어쩌고 하는 것뿐이니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는 게 그때 친구 녀석의 진단이었다. 그 이전까지의 나는 바이칼호수와 선녀, 그리고 나무꾼을 머릿속에 보물처럼 숨겨놓고만 있었을 뿐 그 누구에게도 언급한 바 없었다. 시베리아는 내 희망의 정점이라는 투의 얘기도 당연히 내 가슴과 머릿속에서만 꿈틀거렸다. 그랬던 내가 그런 얘기를 결국 해버리고 만 이유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자꾸 커져가는 불안과 초조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시노미치오의 사진책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호시노미치오의 텐트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나이는 자꾸 들어가는데 남북통일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간다는, 한반도 남쪽 끝에서 바이칼호수까지 언제라도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또는 자동차를 내가 직접 운전해서 종주한다는 꿈을 살아서 실현하기는 틀렸구나 하는 진단에서 오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실망과 절망 같은 것들이 그야말로 나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무한히 부끄럽게 하며 새로운 관심의 씨앗을 던져준 사람이 바로 그 사람, 그 소년, 호시노 미치오였다.

그를 알게 되면서 내 안에 첩첩산중처럼 쌓여만 가던 불만과 실망, 절망 등등의 철부지감정은 싹싹 지워져 갔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동굴에 갇혀 있었던 것인가? 돈에 미친 사람이 돈이라면 무엇이라도 다 하겠다는 정신무장으로 날뛰듯이, 권력에 미친 사람이 권력 쟁취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간악한 행위도 마다지 않겠다는 미치광이 욕망으로 설쳐대듯이, 나도 역시 바이칼호수와 선녀 그리고 나무꾼에 빠져서 다른 것은 거의 못 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몹시 부끄러웠다.

나를 특히 부끄럽게 한 것은 사물이나 현상을 구경꾼처럼 바라만 보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대입해서 파악해내는 그 눈의 깊이와 넓이였다. 이를테면 그는 방금 따먹은 산딸기 한줌을 통해 생명과 환경의 긴밀한 조응을 보는 직관력을 갖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딸기나무 한 그루가 싹을 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익히기까지 육 개월 남짓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알레스카에서는 전년에 쌓인 눈이 녹고 다시 또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꼭 그만큼의 시간, 그러니까 삼 개월 남짓한 동안에 새싹을 내서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익혀낸다는 것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발견한 것이 인류의 미래 아니 생명의 미래와 관련된 어떤 것이었다. 열한 살 원주민 소년이 어느 하루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방식의 자살을 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접근금지 구역이 늘어난다는 불만을 아버지에게 토로하던 소년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언제라도 스키를 타고, 썰매를 타고 마음껏 나다닐 수 있었던 곳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접근도 못 하게 하는 강도 같은 사람들이 늘어만 가니 이게 뭐냐는 불만이었다.

알레스카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에게 네 땅, 내 땅 개념은 전혀 없었다. 미국이 알레스카를 소련으로부터 헐값에 사 들였을 때도 알레스카 원주민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했고,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영악한 자본주의는 그 점을 파고들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본주의가 원주민을 몰살시켰듯이, 알레스카도 이제 곧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호시노 미치오는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와 양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그는 직관하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개발은 어떤 경우에도 파괴를 전제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메리카에서의 파괴는 ‘인디언’이라는 명칭의 사람에 한정돼 있었지만, 알레스카에서의 파괴는 생명 자체에 대한 파괴로 이어질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애를 썼다.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자본주의에 밀려난 것은 아마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유자재하게 뛰어다니던 곰들도 점점 영역이 좁아들면서 난폭성을 띠어가게 됐을 것이다. 어쨌든 호시노 미치오는 원주민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일 년 뒤에 사망했다.

그가 곰의 ‘오해’로 사망한 즈음에 기후학자와 지질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지구의 축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고 나섰다. 자본주의 원리에 입각한 개발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그 시기가 굉장히 앞당겨질 수 있다는 부록이 붙은 경고였다. 슬프게도 그 무시무시한 경고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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