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나에게는 아버지가 두 분 계신다.

한 분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고 또 한 분은 나를 가르치신 아버지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에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2022년 봄날, 또 한 분의 아버지를 잃었다. 두 사람 모두... 나에게 주기만 했을 뿐, 어떤 보답도 받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작가 이외수를 처음 만난 건 2017년도 여름이었다.

늘 똑같은 일상에서 해가 뜨고 지듯 내 인생도 꿈 따위와는 멀어져 아무 생각 없이 무한 반복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외수 작가가 문학연수생을 뽑는다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쓴 소설은 한 권도 빠짐없이 읽을 정도로 나는 그의 팬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글 쓰는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닌 내가 문학연수생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덜컥 지원서를 내버린 건 어쩌면 작가 이외수를 직접 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메일 한 통을 받았다. 행주나 태워먹으며 아무 꿈도 없이 하루하루 살고 있던 내가, 이외수 작가의 7기 문학연수생으로 합격했다는 거였다.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천 ‘모월당’에 도착해보니 내 자리는 작가님의 코 밑, 제일 앞자리 그것도 정 중앙에 이름표가 놓여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작가님의 콧구멍을 올려다보며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마치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좋아하던 작가를 내 눈 앞에서 직접 보고 수업까지 듣게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알던,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후줄근한 옷차림에 젓가락을 벽에 던져 기가 막히게 꽂아버리던 기인의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들개와 칼, 벽오금학도 같은 소설을 쓴 대 작가였기에 왠지 가까이 하기엔 조금 먼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만나본 그는, 때론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인간적이고 소탈하며 소년처럼 순수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다. 활짝 웃을 때 드러나는 나이테 같은 굵은 주름이며 흘러간 팝송을 즐겨 부를 때의 걸걸한 목소리, 한 여름 밤에 러닝셔츠 하나 걸치고 그 많은 제자들의 티셔츠에다 밤을 꼬박 새워 그림을 그려주시던 다부진 손놀림.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과 나눠 마시던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멋지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흥겨운 몸짓들. 힘들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더 가까이에 두고 늘 따듯하게 안아주고 격려해 주던 선생님......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비행기 타고 넓은 바깥 세상에 한번 나갔다 오고 싶다고 말하시던 쓸쓸한 모습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내 마음 속엔 고스란히 남아있다.

2년 전, 선생님이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후 많은 분들이 내게 물어왔다.

이외수 작가님이 지금 어떤 상태이시냐고. 하지만 나 역시 가끔 아드님이 페북에 올려주는 소식 이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선생님이 눈은 뜨셨는지, 말은 하는지, 핸드폰은 볼 수 있는 상태인지 조차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수술은 잘 되었다고 짧은 연락을 받았을 뿐이다. 코로나로 인해 중환자실에 계신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는 방법이 그땐 없었다.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조금씩 재활치료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지만 그놈의 지긋지긋한 전염병 때문에 선생님을 결국 뵙지 못 했다. 하지만 이제 곧, 머지않아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 믿었고 있는 힘을 다해 존버하고 계실 선생님을 마음으로 지지하고 응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처음 선생님 소식을 들은 후, 너무 놀라고 가슴이 아파 한참을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붉고 노란 꽃들이 지천으로 피기 시작했고 할머니들이 봄 쑥을 뜯으러 밖으로 나오는 계절이었다. 그 추운 화천의 기나긴 겨울을 잘 버텨내고 이제 봄이 와서 여기저기 피어나는 예쁜 들꽃 사진들을 페북에 잔뜩 올리실 때인데 선생님은 병원 침대에 누워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실 거라고, 모월당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우리에게 노래도 불러주고 인생에 대한 가르침도 주실 거라고 나는 믿었다.

 

2018년 위클리서울과의 인터뷰 모습 ⓒ위클리서울

2020년 3월, 선생님이 쓰러지기 며칠 전 페이스북에 글 하나를 올리셨다.

“대한민국의 척박한 세월을 무려 칠십오 년이나 존나게 버티면서 살아온 시정잡배입니다. 김일성도 겪었고 김정일도 겪었고 김정은을 현재 겪고 있는 상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장기독재도 겪었고 박정희 군부독재도 겪었습니다.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는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고 소름이 끼치는 대통령들이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결핵도 극복했고 위암도 극복했고 폐기흉도 극복했고 유방암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발기부전에 전립선비대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존버 만복래’라는 말을 불경이나 성경처럼 신봉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도 수시로 읊조리면서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나 아침은 옵니다.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겠습니다.”

버티는 날들이 싸우는 날들보다 한결 거룩하고 눈물겹다고, 우리 함께 어려운 날들을 버텨나가자고 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이번 생 모두를 있는 힘껏 버티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눈물겹게 버티고 버티다 떠나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존버정신’의 창시자답게......

화사한 봄날, 꿀물에 햇빛가루를 한 숟갈씩 배합해서 만든 게 민들레라던 선생님.

그 민들레가 지천인 지금, 선생님은 민들레 씨앗처럼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평생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무거운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이제는 스위스도 가고 프랑스도 가고 아름다운 석양빛을 바라보며 모히또에서 몰디브도 한 잔 하시길... 바래 본다.

지금까지 충분히 애쓰셨고 충분히 잘 사셨다. 그럼 된 거다.

나는 지금,

선생님의 18번, ‘나이만 먹었습니다.’

이 노래를 하염없이 듣고 있다.

.........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 이외수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한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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