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른이 맞습니까?
우리는 어른이 맞습니까?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1.01.13 08: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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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정인이 양부모 첫 재판 현장 스케치
정인이 양부모 첫 재판 현장 ⓒ위클리서울/ 왕성국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나는 좀 단순하고 무식하다. 내 목숨과 크게 관련이 없는 상황이라면, 법에 그닥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사람들하고 관계에 있어서 실리를 따진다거나 유불리를 굳이 계산하지 않는다. 이는 내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고 깊은 탓에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넘쳐나서가 절대 아니다. 사람들과 여러 이해관계로 얽히고 싶지 않고 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단순 무식의 무사안일주의 성향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정말 단순하기로는 일가견이 있는 것이 좋아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밑도 끝도 없이 싫어한다. 예를 들면, 기분이 좀 우울하거나 몸이 피곤해서 쉬고 싶을 때에 누가 술 한 잔 하러 가자고 이끌면 산삼 열 뿌리는 먹은 것 같은 활력을 내뿜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삼시 세 끼 챙기는 일이 귀찮음을 넘어서 버거워 냉장고에 있는 남은 반찬들 털어 고추장에 대충 섞어 한 끼로 버텨낼지라도 북을 하루 온종일 두드리고 있으라면 그깟 세 끼 정도야 우습게 패스할 수 있다.

싫어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또 얼마나 견고한지 세상에 태어나 머리털 나고서부터 제일로 싫은 것이 장소와 상황을 불문하고 아무데서나 뿌룩뿌룩 뀌어대는 방귀소리다. 그렇게 방귀를 뀌어대면서도 주변 사람에게 미안함이나 머쓱함조차 절대 갖지 않는 뻔뻔함, 게다가 정말 싫어하는 상황이니 조심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해도 방귀 주인이 스스로 관여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임을 강조한다. 조심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내비치는 극악무도한 상황에서는 싫어하는 감정을 넘어 혐오에 가까울 정도의 몸서리를 치게 된다(우리 집의 누군가를 험담하는 이야기는 절대절대 아님). 어떤 날은 방귀 주인 앞에서 똑같이 방귀를 뀌어줄까 생각도 하게 된다. 방귀와 함께 터져 나오는 냄새의 고약함과 혐오감을 그대로 느껴보라고 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타인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어이없어 하고 화가 나기 마련일 테다. 그것이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 억울한 상황이 전혀 예상을 할 수 없었거나 혹은 상대에게 대적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경우에 맞닥뜨렸을 때 당한 만큼 돌려준다는 의미로 종종 쓰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원시적 형태의 법전에서 나온 말임을 알고 있는가.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유역인 메소포타미아평원에서 발생한 문명으로 현재의 이라크 지역이다. 인접한 폐쇄적 지형의 이집트와는 달리 개방적인 주위 환경 때문에 주변의 여러 민족들로부터 침입이 잦았고 정치적 변화 또한 매우 심했다. 수차례 왕국이 건설되고 쇠퇴하기를 반복하다가 기원전 2000년경에 이르러 아무르인이 바빌론에 도읍을 정한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했는데, 이 왕국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일하며 전성기를 이뤘다. 함무라비 왕은 여러 부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규약들을 체계화하고 제도화한 법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인류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고 있는 함무라비 법전이다.

높이 2.25m 크기의 돌기둥인 함무라비 법전은 정의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던 태양신 사마시로부터 통치권을 신탁 받고 있는 함무라비 왕의 부조가 있고 그 아래쪽으로 법전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법 규정 중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구가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뼈도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릴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감정보다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지식과 교양을 쌓고 학습하는 현재에 이르러 이 법 규정을 접하게 되면 참으로 잔인하고 하고 무식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끼친 손해나 상해의 똑같은 양만큼 처벌을 규정하는 소위 원시적 법제 형태인 ‘동해 보복의 법 원칙’이 적용되고 있으니 단순 무식한 성향의 나로서는 그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법이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의 8조법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논리의 법이 제정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정인이 양부모 첫 재판 현장 스케치 ⓒ위클리서울/ 왕성국 기자
ⓒ위클리서울/ 왕성국 기자
정인이 양부모 첫 재판 현장 스케치 ⓒ위클리서울/ 왕성국 기자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당한 만큼 갚는다는 논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절대적이고 합리적인 법칙이었나 보다. 그러니 내 집에서 내 맘대로 방귀도 마음껏 못 뀌냐는 신념으로 뿌룩뿌룩 뀌어대는 방구주인 앞에서 똑같이 방구를 뀌어주는 것이 가장 합리적으로 동해 보복을 하는 것이겠지만, 이놈의 방구가 내 맘대로 뀌어지지 않으니 그것이 문제다.

비록 방구테러에 대한 보복은 방구조절의 실패로 할 수 없게 됐지만 똑같이 보복을 해주고 싶은 일이 요즘 하나가 생겼다.

이유도 모른 채 학대당하고 방치되고 장기가 파열되는 고통을 겪다가 생을 마감한 아이의 양부모에게 함무라비 법전의 법 규정을 적용해주고 싶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 보복의 법 원칙을 적용해서 16개월 아이에게 가했던 신체적 충격과 정신적 무력감을 그대로 돌려주자는 말이다. 얼마나 합리적인가.

사실 이실직고를 하자면, 결혼하기 전 철없던 때의 나는 어린 아이를 무척 싫어했다. 그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워낙 단순하고 무식했던 터라 어린 아이가 왜 싫은지 조차 이유도 없이 그냥 싫었다. 어느 날 지하철 옆 자리에 어린 아이가 엄마와 함께 앉았는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어린 아이가 너무 거슬렸다. 아이의 다리를 저만큼 밀어 냈다. 물론 아이 엄마가 눈치 챌 수 없도록 교묘하게 말이다.

훗날 결혼을 하고 또 내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그 움직임이 너무나 당연하고 필요한 과정임을 깨달았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쩜 이렇게 돌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에 대한 자세나 인식이 바뀌었다. 그들은 무조건 보호하고 사랑해 줘야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맘껏 성장할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제도적으로 보살펴 줘야 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몫이거늘 양부모는 무엇 때문에 아이에게 학대를 가하며 제도권은 왜 사실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방치하는가 말이다.

16개월 짧은 생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신체적인 고통과 정서적 무력감을 안고 떠난 아이에게 이제 와서 추모한답시고 근조화환을 늘어놓고 바람개비를 꽂아 놓은들 그것조차 어른들의 위안일 뿐 아이는 돌아올 수 없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미안해서 할 수가 없고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는 단순하고 무식한 인간이다. 그러니 눈에는 눈이고 이에는 이다. 바꾼다고 될 일도 아니다. 당한 만큼 돌려줘야 속이 풀리고 아이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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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u 2021-01-13 10:20:59
처음부터 끝까지, 무단 방구가 싫은 것부터 저항조차 못해보고 고통속에 떠나간 어린 아이의 보복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전부 다 100%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