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라떼는 말이야!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0.08.18 08: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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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pixabay.com, 그래픽=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나도 한 때는 기성세대로부터 눈총 좀 받은 시절이 있었다. 한 겨울 두터운 외투를 입어도 옷 깃 사이로 스며드는 칼바람에 코끝이 빨갛게 얼어붙고 어깨를 움츠릴지언정 외출복은 미니스커트였다. 입은 둥 안 입은 둥 했을 스타킹에 무릎 위로 한참은 올라가는 미니스커트는 계절불문하고 멋 좀 부린다는 여성들이 즐겨 입는 의상이었다. 거기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와인색으로 염색하고 어느 유명 배우가 유행시킨 사자머리 파마를 즐겨 했다. 엄마는 엄동설한에 희멀건 다리를 다 드러내고 수사자 갈기 같은 내 머리상태를 보며 걱정하셨다. 혹여 내 허파에 빵꾸가 나서 헛바람이라도 들지는 않는지, 행여 주변 어른들께 잔소리나 듣고 댕기지는 않는지…. 대개의 어른들은 당신들이 살아오신 삶의 신념이나 가치관등에 반하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 또는 행동거지들을 놓고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방식의 진보적인 행태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일단 종말과 말세가 코앞에 닥친 것 마냥 걱정하면서 혀의 빠른 운동을 시작한다.

“쯧쯧쯧… 말세야 말세.”

때로는 세대 간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해 설전을 벌이는 경우가 생기면 기성세대는 당신들의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는 젊은 세대를 생각 없이 산다고 가차 없이 몰아 부치기도 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고리타분하고 앞뒤 꽉 막힌 꼰대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물론 일부의 이야기일 수 있다. 여러 가지 생활 여건이나 환경들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국가 간 교류도 활발해 지구촌으로 엮여 버린 세상에 살고 있으니 라떼만(‘나 때’를 비유한 신조어) 주장하다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외면당하기 십상일 터. 하여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앞뒤 꽉 막힌 부모 또는 꼰대라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에 나름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또 스스로 그러하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뉴스에서 토요일인 광복절에 이어 8월17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코로나19로 지친 의료진과 국민들에게 휴식권을 보장하고 소비심리를 조장해서 내수 활성화를 기대한다는 등의 취지로 총 사흘을 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만 해도 연휴가 있는 달이면 미리 여행계획을 잡고 장소 물색도 하고 숙박 예약도 서둘렀다. 그러나 지금은 여행은커녕 사흘 연속 삼시세끼로 뭘 준비해야 하나에 고민이 먼저 앞선다. 뜻밖에도 나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네티즌들의 관심은 여행지나 음식메뉴가 아니라 ‘사흘’이라는 거다.

어느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로 1위에 랭킹 될 만큼 사흘이라는 단어가 네티즌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은 이유는 어이없게도 사흘의 뜻을 알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는 것은 뉴스의 댓글 내용이었다. 사흘이란 단어를 4일로 착각한 네티즌들은 임시 공휴일 포함 총 3일을 쉬는 건데 왜 4일을 쉰다고 기사를 썼냐는 둥, 또 다른 네티즌은 3일이라는 우리말을 두고 사흘이라는 한자를 썼냐며, 공정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한 기자에게 있는 대로 욕을 하니 기자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며 자다가 물벼락을 맞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 생활에 외국어는 시나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IT기술이 발달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곳곳의 소식을 클릭 하나로 언제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세상에 살다보니 다른 나라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 하는 건 어쩌면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영어는 필수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었으며 제2외국어로 일어나 중국어, 독일어 등 알아두면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는 외국어는 정말 많겠지만 반면 모국어에 대한 관심이 줄어 든 것 같아 많이 아쉽다. 푹푹 찌는 한 여름 더위에 얼음 동동 띄워 마시던 냉커피는 온통 영어 이름으로 불리는 커피숍에서 발음도 잘 안 되는 어려운 단어들로 조합이 되어 있다. 무슨 무슨 마끼야또, 스무디… 내용물이 짐작도 안 되는 어려운 단어들 속에 그나마 자주 애용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글자로 줄여서 ‘아아’로 표현하더라. 뷰(view)가 좋은 곳에서 고기를 구울 땐 솔트(salt)를 뿌려야 하고 택배가 오면 언박싱(unboxing)하는 세상이 돼버렸더라. 경치가 좋은 곳에서 고기를 구울 때 소금을 뿌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다. 택배가 오면 개봉을 해서 내용물을 확인해도 될 것을 굳이 언박싱이라는 영어를 쓰면 좀 더 있어 보이나? 사흘이 순 우리말인지 아닌지 며칠을 뜻하는지도 모르면서. 3일(三日)이 한자 표기인지 아닌지 무지몽매함을 드러내며 우리는 온통 외국어로 포장된 삶을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도 노트북(notebook)을 열어 놓고 마우스(mouse)를 클릭(click) 해 가며 키보드(keyboard)를 두드려 글을 쓰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내가 살아 온 방식을 고수하자는 주장은 절대 아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글로벌한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새로운 문명은 현실에 맞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단한 한국인의 뿌리를 기반으로 한 확고한 자기 정체성이 분명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흘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사흘이 뭐냐며, 4일이냐고 되묻던 우리 집 청소년부터 교육시켜야겠다. 등잔 밑이 어두운 탓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남부끄러운 일이다. 라떼는 말이야! 천자문에 명심보감 읽으며 자랐다고 꼰대질 좀 해야겠다.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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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 2020-08-31 12:53:36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글로 써도 충분한 것들을 굳이 영어로 써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40대 아저씨로서 완전 공감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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