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떠난 그가 나의 어머니를 만났을까?
5월에 떠난 그가 나의 어머니를 만났을까?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0.05.15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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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5월의 꽃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5월은 지나치게 풍성하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 하다고 했겠다. 게다가 5월의 달은 밝기도 하다.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가위의 달이 크고 밝다지만 5월의 달만 할까 하는 생각조차도 든다. 소쩍새는 어쩌자고 저리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밤새 질러대고 있는 것이냐. 귀거래사 중 한 소절을 읊조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그 안에 내가 숨 쉬니 어디인들 갈 곳이야 없으리.

한밤중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니 아주 커다란 자유가 내 가슴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금세 작아져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그야말로 쟁반만한 5월의 달이 하늘 중간에 걸려 있으니 잠도 안 온다. 동네 개들은 밤새 짖었다. 어떤 녀석은 구슬프게 우는 소리를 내고 있기도 했다. 지나치게 밝고 큰 달을 보면 짖거나 우는 개들의 마음이 너무도 궁금해서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답을 얻지는 못했다.

내 마음도 제대로는 모르는 주제에 개의 마음을 궁금해 하다니. 어느 순간 깜짝 놀라서 나 자신을 꾸짖었다. 실소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아마 피식, 피식, 한참을 웃었겠지만, 해가 뜨고 달이 뜨고 그 안에 내 숨 쉰다는 노래 가사에 주눅이 들었던 것인지 짐짓 심각해 하고나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 방울, 두 방울, 아닌 밤중에 자다가 깨서 눈물을 흘렸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5월에 떠났다. 불특정 다수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내 기억을 아롱다롱 채색하고 있는 사람만도 아마 스무 명은 될 것이다. 어려서부터 알았던 사람도 5월에 많이 떠났고, 중년에 접어든 뒤에 우연히 알게 됐던 사람도 역시 5월에 많이 떠났다. 그 많은 과거의 사람들이 무작위로 획획 바람결에 허공을 떠돌다가 사라져 간다.

쟁반처럼 둥근 달 속에서 어머니의 웃는 모습을 보았던가? 어머니의 뒤쪽 어딘가에서 그가 또한 웃고 있었던가?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모르겠다. 어쨌든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동시에 5월의 보름달을 배경으로 살풋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그는 작년 5월 우리 집 마당의 무꽃이 하얗게 피어 있던 날에 갔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가 갔다는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 나의 어머니는 5월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던 날 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가던 중 아카시아 나무 밑에 차를 세워놓고 바나나를 까먹었던 기억이 어제만 같다. 신기하게도 어머니는 그날 내가 권하는 바나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풍성한 5월의 꽃
풍성한 5월의 꽃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집에서는 그렇게도 모든 음식을 거부하시던, 입에 넣었다가도 금방 도로 뱉거나 게워내던 어머니가 바나나를 맛나게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심 병원 같은 데는 안 가도 되려나 했었다. 그런데 의사는 입원을 명령했고, 그 뒤로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가버린 나의 어머니와 그가 동시에 나타났다가 인사도 없이 사라져 간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추론을 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인생을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겼던 내가 뜬금없는 집을 사서 마당을 가꾸던 시절이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마당에 잔디를 심고, 수선화에 튤립에 꽃무릇에 온갖 화초를 심고, 우편함에 알을 낳고 새끼까지 까놓은 작은 새를 보며 키득거리는 재미에 잔뜩 취해 있던 어느 하루 낯선 이메일이 하나 들어왔다. 내가 쓰는 글을 잘 보고 있다고, 자기가 얼마 전에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하나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함께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타블로이드판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가판대에 걸려 있는 그 요란하게 선정적인 이미지들이어서 그리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나중에 받아본 실물을 보고서는 눈을 크게 떴다. 아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대한민국 땅에 있었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그의 고향이 전라도 고창이고, 고창에서도 내가 새로 둥지를 튼 해리와는 지척지간인 상하면 어디라는 대목이 내 마음을 끌었다.

얼마나 지나서 마침내 전화통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는 대뜸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 호칭이 뭐랄까, 깜짝 반갑고 좋으면서도 낯설어서 한참을 버벅거렸다. 그 뒤로도 그 호칭은 끝내 온전한 내 것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친동생의 친구들한테도 선뜻 하대를 못 하고 경어를 쓰는 내 성격 탓이었다. 그는 통화를 할 때마다 형님, 형님 하고 있었고, 나도 언제인가는 그에게 아우님, 아우님, 할 수 있는 날이 오겠거니 했지만 그날은 결국 못 오고 말았다. 그와 내가 면대면을 자주 했더라면, 그래서 쓰디쓴 소주잔이라도 기울이는 횟수가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내 가슴에 앙금처럼 남았으니 이게 뭔가.

일 년이 가고 삼 년이 가고 오 년 넘어 십 년이 다 돼가건만, 그와 나는 딱 한 차례 면대면을 했을 뿐이었다. 기회랄까 계기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고 제법 있었건만 언제나 엇갈렸다. 돌아보면 세월 한 번 겁나게도 빨리 그리고 바쁘게 허둥지둥 가버렸다.

육군 중사였던 내 막내동생은 결혼을 했고, 결혼을 하자마자 선물처럼 상사로 진급을 했고,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결혼할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내 옆에는, 마치 어머니가 보내주신 것처럼, 꿈속에서도 생각해본 바 없는 여인이 있게 되었다. 그녀가 내 옆에 있기 시작한 지 일 년을 조금 지난 어느 하루 그가 지금 고창에 와 있다고 전화를 해 왔다. 일이 있어 고향에 왔다가 일 다 끝내고 지금 구시포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고, 만나서 함께 소주 한잔 하고 싶다는 거였다.

 

봄날의 묘제
봄날의 묘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날은 육군상사 막내동생이 색시랑 함께 와 있었다. 처가에서 전라남도 신안 어딘가에 새우양식장을 사서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이 나왔다고, 그것을 형들이랑 형수들이랑 함께 먹고자 해서 왔다는 것이니 제법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첫 작품인 새우를 어떻게 먹을까. 구워 먹을까 쪄서 먹을까. 삶아 먹을까 탕을 끓일까. 그런저런 궁리를 해대며 키득거리고 있는 참에 걸려온 그의 전화는 뭐랄까, 마치 내가 거대한 무슨 시험에 들었다는 느낌이었다.

“가요 그냥.”

난감해 하고 있는 나를 보던 내 옆의 그녀가 명쾌하게 정리를 해 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함께 갈 채비를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함께 가자는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함께 갈 채비를 차리고 있는 그녀가 뜬금없다 싶으면서도 고마워서 나는 한참을 먹먹해 하고 있었던가 어쨌던가. 그 와중에 제수씨들은 아이 참 어쩌나, 어쩌나, 하고 아쉬워하면서도 반찬통 하나에 그득 새우를 담아내는가 싶더니 손수 차에 실어주었다.

구시포는 초행길이 아닌데도 초행처럼 낯설고 번잡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어찌 그리도 똑 들어맞던지. 마침 물이 잔뜩 들어와서 찰랑거리는 중이었고, 낚싯대를 들고 헤매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엉켜서 일보 전진에 이보 후퇴를 반복해야만 했다. 나로서는 그 종류마저 알 수 없는 무슨 물고기가 떼로 몰려와서 낚싯대를 던지기만 해도 잡힌다는 소문이 돌았던 까닭에 그렇게도 많은 차량과 사람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해수욕철도 아닌 계절에 구시포가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로 몸살을 앓은 것은 아마 그날이 처음이었을 게다. 그리 넓지도 않은 면적이건만 사람 하나 찾는 게 그렇게도 어려울 수 없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전화통화를 몇 번이나 했어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구시포 인근이 고향이라서 작은 바위 하나의 명칭까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저기, 저기, 혹시 저 분 아닐까?” 내 옆의 그녀가 깜짝 소리를 내며 홱, 뒤를 돌아보고 있었지만 나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미처 고개를 돌려볼 사이도 없이 지나치고 말았다. 앞에서 뒤에서 경쟁적으로 빵빵거리는 차량들 때문에 유턴 같은 건 상상으로도 불가능한 지점이었다. 돌고 돌고, 또 돌기를 얼마나 한 뒤에 드디어, 마침내, 찾아냈다 싶은 순간 내 옆의 그녀가 박수를 쳤다.

“맞았어. 내가 제대로 봤어.”

그 말을 듣고 신기해서 어떻게 알아봤느냐고 했더니 그녀 왈, “글쟁이 티가 나잖아”하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별 쓸모 없는 것들을 죄다 걷어내 버린 것 같은, 뼈만 남았구나 싶은 그는 그때 이미 취해 있었다. 낚시를 한다고 했지만 던져놓은 낚싯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매형과 동생 그리고 조카 그렇게 네 남자가 안주도 없는 술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가을날의 벌초
가을날의 벌초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보아 하니 흔해빠진 망둥어나 몇 마리 건져서 그것으로 술안주를 삼았던 것 같았다. 그나마도 남은 것은 앙상한 머리통 몇 개뿐이었다. 나는 제수씨가 싸준 생새우를 꺼내다가 쫙 펼쳐놓았다. 새우는 날 것으로 먹어야 제 맛이라는 둥, 껍질도 버리지 않고 오물오물 씹으면 신기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는 둥,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지껄이고 있었던 그날의 내 모습이 껄렁껄렁한 불량배 소년 같았다고 내 옆의 그녀는 나중에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생새우를 껍질 채로 으적으적 씹어가며 소주를 마셨다. ‘위클리서울’에 글을 쓰는 몇몇 기자와 필자의 이름을 내가 언급하며 누구는 누구 같고 또 누구는 누구 같다고 아는 체를 하고 있을 때 그는 짐짓 놀랍다는 투로 어떻게 알았지? 하고 감탄사를 남발하며 킬킬거렸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고, 노을이 볼 만하다고 누군가 서정적으로 읊조리는 순간 벌써 어둠이 착착 깔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하나?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할까? 나는 소심하게도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었고, 그는 고민할 게 뭐냐는 듯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기 집이 아니라 형님 집인데 형님은 지금 안 계신다고 했다. 어디인들 어떠랴. 아무려면 어떠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캄캄한 밤길을 나는 그저 따라나 갔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전력연구소뿐이었다. 전력연구소를 지나서 해송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무슨 소굴 같은 곳으로 쓱쓱 들어가는데 흡사 무슨 외계인들에게 유인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집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가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꾸벅거리더니 벽에 등을 대고 있었고, 그리고는 그냥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매형과 동생이 그를 떠메다가 다른 방으로 옮겼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나? 내가 내 옆의 그녀에게 눈짓으로 의견을 묻고 있는 동안 그의 매형과 동생 그리고 조카는 새로운 술상을 차리고 있었고, 싫다거나 좋다거나 의견을 표명할 사이도 없이 우리는 다시 술판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지껄여가며 술잔을 기울인 지 얼마나 되었는지, 이제는 나도 취했고, 자고 싶어지고 있었다. 자고 싶어지는 순간 술이 확 깨었다. 여기서 잘 수는 없지 않은가. 나 혼자라면야 얼마든지 자겠으되, 내 옆의 그녀를 어쩌면 늑대들인지도 모르는 사내들 속에서 함께 자자고 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때만 해도 음주운전에 관한 경각심이 그리 크게 높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긴장한 나는 술이 취했으면서도 사리분별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고, 이 긴장이 풀리기 전에 어서 떠나자 하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희한하게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작은 동네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얼마나 헤매던 끝에 겨우 길을 잡아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나는 이미 반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것도 5월의 꽃
이것도 5월의 꽃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다음 날 아침인지 오전인지, 시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때인가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로 가는 자동차 안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 잠도 깨지 않았는데 그는 벌써 잠이 깨서 서울로 가는 중이라는 거였다. 아따 참 부지런도 하시네, 하고 내가 중얼거렸던가. 그는 민망해 하는 투가 역력한 목소리로 “맛탱이가 가서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

그랬다. 그때 우리는, 그와 나는 더 이상의 얘기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술이 취하면 아까 전에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하는 식으로 술을 깨는 사람이 있고, 그대로 곧장 잠이 들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 죽은 듯이 잠들어버리는 사람이니까.

그날의 통화에서 우리는 아마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약속했다기보다 믿는다는 얘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 믿음은 어디의 무엇에 근거한 것이었던가? 아마도 상식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봐서 그와 내가 다시 못 만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뒤로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이유는 딱 하나, 그와 내가 매번 같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추석 전에 벌초를 하러 왔다고 전화를 해 오는 날이면 나 또한 동생들과 함께 벌초를 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고, 그가 봄날의 산소에 제사를 모시러 왔다고 전화를 해 오는 날이면 나 또한 집안의 어른들과 동생들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산에서 묘제를 지내고 있는 중이었으니, 원 세상에 엇갈림도 이런 엇갈림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도 만나기 어려웠던 그가 오늘 밤 나를 찾아왔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와 함께 나타났다. 이건 대체 무슨 현상인 것인가.

나로서는 상상도 해볼 수 없는 그곳 어딘가에서 그는 혹시 나의 어머니를 만난 것일까. 만나서 당신 아들과 이렇고저렇고 그런 사이라고 말한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나의 어머니는 아마 이렇게 반응했으리라.

“오매 그러시오.”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어루만지는장면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루엣일 뿐이다. 보고 싶다. 그 장면을, 실루엣으로서가 아니라 만지면 온기가 느껴지는 생생한 모습으로 보고 싶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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