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얼굴이 멋들어진 남자들의 집 만돌뻘집
웃는 얼굴이 멋들어진 남자들의 집 만돌뻘집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0.12.02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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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바람공원 봉오리
바람공원 봉오리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본래의 명칭보다는 만돌로 더 잘 알려진 고창의 심원면 만월에는 바람공원이 있고, 바람공원 바로 아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기로 유명한 만돌뻘집이 있다. 고창에서 만돌뻘집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미성년이거나 생선 알레르기 있는 사람 외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각종 매운탕과 생선회를 메뉴로 걸어놓고 있긴 하지만 특화된 품목은 하나도 없는 집이다. 그물에 걸린 어종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날의 주된 메뉴와 서비스 종류가 정해지는 매우 역동으로 변화무쌍한 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집을 가고자 하면 일단 전화부터 해봐야 한다. 얼핏 예약 같지만 예약전화는 아니다.

“오늘 뭐 좀 건져온 거 있어요?”

만돌뻘집에 대해 뭔가를 좀 아는 사람은 대개 이런 식의 질문을 한다. 그러면 즉각 답이 나온다. 오늘은 별 게 없다거나 굉장히 많다거나 딱 두세 마리 걸렸다거나 셋 중에 하나의 답이 나오는데 겨울에는 숭어와 농어 그리고 물메기가 습관적으로 언급되고, 겨울이 아닌 계절에는 생선회나 매운탕으로 쓸 만한 거의 모든 어종이 망라된다.

전화를 건다고 해서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제대로 맞춰서 전화를 했다면 그 즉시 받아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두 번, 세 번, 열 번을 해도 안 받아준다. 전화를 안 받고자 해서 안 받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다함께 바다에 나가서 땀을 흘리고 있는 까닭에 전화 같은 것은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일 뿐이다.

내가 활터 선배를 따라 이 집을 처음 와서 “야아 인간미가 팍팍 풍긴다,” 했을 때만 해도 아들은 없었다. 아들이란 존재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눈에 띄게 무슨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긴 그때는 간판도 변변한 것이 없이 유리창에 그냥 검정 페인트로 투박하게 뻘집, 이렇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메뉴도 없고 전화번호도 안 적혀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이게 뭔가, 하고 고개를 한참이나 갸웃거리기에 충분한 집이었다.

이 뻘집이 만돌뻘집이란 이름의 음식점 등록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듣다 보면 파란만장이란 단어가 절로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온다. 칠십 년대라고 하는, 무려 오십 년 세월을 단숨에 건너뛰어야 하니 숨도 차고 아득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치하의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부채감이 느껴진다.

“장하십니다.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으니 얼매나 장한 일입니까.”

아버지의 고향은 장성이란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으면서 평야도 제법 널찍하게 갖춘 고창에 비하면 장성은 지금도 첩첩산중 오지를 연상케 하는데 칠십 년대에는 어떠했을까. 물어보는 게 부질없다 싶을 정도로 삶의 조건이 형편없었다. 평상시에도 가난을 숙명처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숙명보다 천 배는 더 큰 재앙이 덮쳤다. 대흉년. 그에 따른 대탈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산비탈을 따라 고향을 등졌다.

그의 나이 십대 후반에 그 일이 벌어졌다. 호남지역에 가뭄이 극심해서 풀과 나무가 속절없이 타죽어 갔고, 먹고살 것이 없어진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청계천변이나 미아리. 봉천동, 옥수동, 아현동 등등 산비탈에 판자때기와 넝마로 얼기설기 움막을 지어놓고 변소 청소나 하수구 청소 혹은 공사판의 잡역부 같은 도시의 온갖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면서도 인건비는 살인적으로 형편없는 일을 처리해냈다.

 

바다로 가는 길
바다로 가는 길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단호한 심정으로 고향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떠난다 해도 아주 멀리 가지는 못하고 옆 동네로 빠져 나와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오십여 년 뒤 ‘만돌뻘집’이란 고유명사를 개척해낸 노곤수씨다. 그는 그 시절의 감회를 얘기해 달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와아-따야 장성 촌놈이 고창 땅을 밟고 서서 보자니 여기가 어디냐, 달나라냐 별나라냐, 싶더라고요.”

앞을 봐도 산이요 뒤를 봐도 산, 왼쪽을 봐도 산이요 오른쪽을 봐도 산인 그야말로 첩첩산중 오지에서 산나물이나 더덕, 도라지 따위를 캐는 일로 직업을 삼아온 십대 후반 청년이 고향을 떠난 이유는 오직 하나 배가 고파서였다. 고창을 목적으로 집을 나선 것도 아니었다. 어디든 그냥 가보자는 생각으로 산비탈을 오르고 내리기를 몇 번이나 해서 도착한 곳이 고창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도착한 곳이 운수 좋게도 바닷가였다.

바닷가, 물이 들어올 때면 새우를 비롯한 온갖 물고기가 펄떡펄떡 뛰는, 물이 나간 뒤에는 각종 조개와 농게, 칠게 같은 식량거리가 지천으로 기어 다니는 곳, 교과서 같은 데서 비현실적으로 어렴풋이 소문처럼 접했을 뿐인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고, 그런 놀라운 세상 속으로 자신이 들어와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또한 놀랐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취직이란 말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런 걸 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은 꿈속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 그가 번갯불에 콩이라도 볶아 먹듯이 취직을 해버렸다. 처음부터 취직이란 생각을 하고서 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어떤 사람이 염전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알음으로 염전이란 데를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따라갔다가 그대로 덜컥 취직이 돼버린 거였다.

그가 염전을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소금장수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구분 없이 지게에 소금가마를 지고 이따금 나타나는 소금장수는 소년의 가슴을 휘저어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딱히 누구네랄 것도 없이 마을 사람 모두가 바가지 같은 것을 들고 나와서 소금장수를 에워싸고 도는 풍경도 기억에 새겨질 만한 것이었지만, 사람은 소금이 없으면 못 사는구나 하는 깨달음 플러스 소금은 어디서 가져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며칠씩 눈을 깜빡이곤 했었다는 거였다.

소금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몰랐던 열아홉 살 청년의 눈에 비친 고창의 염전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쓸모없는 땅이라고 해서 일부는 산을 깎아다가 골프장을 만들고, 일부는 벼농사용 논으로 개간을 하고, 나머지는 소고기 생산을 목적으로 사육하는 소에게 먹이면 좋다 해서 아무나 베어가는 갈대밭이 되어 있지만, 그 당시 고창의 염전은 해리면 동호에서 북으로는 활궁(弓)자 궁산까지, 서쪽으로 달이 꽉 찬다고 하는 심원면 만월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끝도 안 보이게 펼쳐진 대평원이었다.

 

소박한 간판
소박한 간판

어쨌든 열아홉 살 청년은 염전의 염부가 되었다. 염전 일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힘들었지만 힘듦을 상쇄하고도 남을 커다란 기쁨이 있었다. 월급은커녕 일당도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청년에게 보름마다 한 번씩 주어지는 ‘간조’라는 이름의 돈봉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설렘이요 희망이요 흥분이었지만, 저축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알게 해준 이중 삼중의 설렘이요 희망이요 흥분이었다.

저축을 해서 나중에 그 돈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중장기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자기 이름이 똑똑하게 적힌 예금통장이 있다는 것, 그 통장이 죽은 것처럼 꼼짝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보름마다 숫자가 더해지는 방식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는 내일 죽어도 좋을 것처럼 가슴이 터지게 설레었다.

그 바람에 그는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게 살았다. 염전에 일이 없는 겨울에서 봄까지 다른 염부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있거나 도박판을 기웃거리는 등으로 한가했지만 그는 한가할 틈이 없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던 중에 만난 자전거포 주인의 배려로 자전거 관련 일을 하게 된 그는 이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기쁨으로 밤잠을 설쳐야만 했다..

버스를 한 번 타고자 해도 족히 이십 리는 걸어야 했던 시절에 자전거는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때문에 자전거와 관련된 일은 차고도 넘쳤다. 도로포장이 하나도 안 돼 있는 까닭에 넘어져서 자전거 바퀴가 엉망진창으로 구부러지기도 하고, 펑크가 나기도 하고, 살대가 부러지기도 하고 등등 하여튼 지금 생각하면 큰일은 거의 없어도 잔일은 엄청나게 많은 업종이어서 하루 일을 끝내고 나면 머릿속이 획획 돌아갈 지경이었다. 얼마나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 왔는지, 언제 어떻게 해서 결혼까지 할 생각을 했었는가는 지금 기억에조차 남아 있지 않단다. 어느 날 보니 아내가 생겨 있었고, 오두막이나마 집도 한 채 생겨 있었고, 집 앞에는 텃밭도 무려 두 마지기나 생겨 있었고, 산골짜기 장성 고향에서 부모님까지 모셔온 살림을 살고 있더란다. 그 어느 날이 언제인가 하면, 염전이건 뭐건 일거리가 대폭 줄어든 시기의 어느 날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어느 날 문득, 벼락처럼, 실업자가 돼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깔끔한 정제염이 등장하면서 투박한 천일염 수요가 급감한 까닭에 염전이 속속 폐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여기로 저기로 도로가 뚫리면서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고, 자전거포는 당연히 문을 닫았다.

 

아버지
아버지
아들
아들

“와따 이거이 뭐다냐 싶습디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득하다는 듯이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부끄럽게 웃었다. 하기 쉬운 말로 그는 현실을 직시했다. 아차 잘못 하면 굶어죽을 판이었다. 열아홉 청년 시절이라면야 굶어죽기 그것 무서울 것도 없겠지만 이제 그는 청년이 아니었다. 부양할 가족이 다섯 손가락을 채울 정도의 무게를 지닌 가장이었다.

그는 바다로 나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나선 길이었다. 물이 나가면 끝도 안 보이게 펼쳐진 갯벌이요, 물이 들어오면 시퍼렇게 찰랑거리는 바다, 그 바다에서 가끔 낚시질로 몇 마리 건져다가 밥반찬을 해보았을 뿐 고기잡이를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해야 한다. 고기잡이를.

아는 게 없으니 고기가 잡혀줄 까닭이 없었다. 근처에 고기잡이를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도 없었다. 동호나 구시포 쪽에는 고기잡이가 직업인 사람이 꽤 있었지만 그들은 다 어선을 운영한다. 어선은 아무나 구입할 수 있는 자전거 같은 것이 아니다. 어선이 없어도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있다. 있었다. 알고 보니 이강망이란 이름의 그물이 있었다. 이것도 물론 아무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선보다는 열 배 아니 스무 배 이상 돈이 덜 들어가는 도구였다.

이강망을 설치했다 해서 무조건 고기가 들어가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세월이 또 필요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드디어, 고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고기를 잡았다 해서 그것이 곧바로 살림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또 몇 달인가의 세월이 필요했다.

간단한 공식이 있었다. 죽은 물고기는 가격이 낮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가격이 높다. 이강망에 잡힌 물고기는 대부분 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물고기를 건져서 지게에 지고 삼 킬로미터도 넘는 갯벌을 걸어오다 보면 다 죽어버린다. 비유를 하자면 돈을 손에 들고서도 흘려버리는 격이다. 흘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갈대밭으로 변한 염전
갈대밭으로 변한 염전

산 채로 잡은 물고기를 산 채로 가져오자면 커다란 물통이 있어야 하고, 물통을 지게에 지고 다닐 수가 없으니 다른 기계가 있어야 한다. 이래서 그는 경운기라고 하는 새로운 기계를, 겁나게도 많은 돈을 투자해서 구입하게 된다. 내친 김에 수족관도 마당에 하나 설치했다. 바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시장으로 달려가기에는 너무 힘이 들어서 고안해낸 이를테면 정거장 개념으로서의 수족관인 셈이었다.

이때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소문을 퍼뜨리자고 해서 퍼뜨린 것은 아니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이, 그러니까 이웃 사람들이 집에 왔다가 수족관을 보고 감탄했고, 자신이 본 것을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틈날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뜨려준 것일 뿐이었다.

어느 하루 이웃에서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데리고 왔다. 소주까지 큰 걸로 한 병 들고서였다. 생선회가 먹고 싶어서 왔다는 거였다. 주인은 너무 뜬금없는 소라라서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이 얘기가 또 소문이 났고, 이때부터 툭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이름까지 붙였다. 뻘집. 갯벌에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아서 갯벌을 가로질러 왔으니 뻘집이란 거였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멀리서 손님이 찾아오거나 무료해서 술 생각이 나면 술을 들고 뻘집으로 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 때는, 주변뿐만 아니라 고창군 전역에 소문이 돌았다. 주인은 텃밭에 푸성귀를 심어놓고 손님을 맞이했다. 내가 잡은 물고기와 내가 기른 야채로 손님을 접대한다는 얘기는 차츰 뻘집 주인의 큰 자랑이 되어갔다. 고로 음식값이 비싸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그렇게 또 십여 년이 흐른 뒤에는, 건물을 대폭 고치고 간판도 크게 새로 달았다. 만돌뻘집이라고.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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