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저서를 읽다보면 다산이 가장 좋아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정말로 다산은 무엇을 가장 좋아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얻어낸 결론은 대충 세 가지라고 여겼습니다. 이제 그 세 가지를 하나씩 풀어서 이야기해 보렵니다. 다산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착한 일을 즐거워하고 옛것을 좋아했노라(樂善好古:「자찬묘지명」)”고 말하여 자기는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명확히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런 ‘호고(好古)’는 아무나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합니
시험을 보려면 의당 시험지가 있어야 합니다. 시험의 종류도 여러 가지, 성적을 매기려고 학생들에게 보이는 시험에서 취직을 위한 시험, 자격을 얻기 위해서 치르는 자격시험에 이르기까지 시험을 보는 사람이라면 좋은 성적을 내고 합격할 수준에 이르는 점수가 나오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 욕구가 절제되지 않는 한 시험지 유출이라는 잘못된 일은 종식되기 어려운 것임에 분명합니다. 요즘도 언론보도에 의하면 어떤 고등학교에서, 어떤 공기관에서, 아니면 어떤 입시시험에서 시험지 유출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본질
『목민심서』 48권의 거대한 책은 목민관들이 바이블로 삼으라고 다산이 저술한 책입니다. 다산 자신이 평생의 목표로 정했던 ‘공렴(公廉)’이라는 대원칙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이자 모범적인 사례들로 가득 찬 책이기도 합니다. 공정하고 공평한 공무집행에 청렴이라는 도덕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때에만 목민관은 제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은 그런 목민관을 만나야만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노라고 주장한 책이기도 합니다.‘율기(律己)’편의 청심(淸心)조항에서 그렇게도 많은 사례를 들어 목민
일생동안 다산의 저서를 읽으면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궁금한 것은 다산의 얼굴 모습입니다. 그분의 시나 글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상상하면서 다산의 얼굴 모습을 그려보지만 생각으로만 뱅뱅 돌 뿐, 그의 참모습을 그려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그만한 인물이고 큰 학자였으면서도 그분의 진짜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유옥사 이후 오랫동안 역적죄인의 신세였고, 집안조차 폐족이 된 상태라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초상화 진본을 남길 수 없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고, 1925년 을축년의 대홍수로 한강 상류가
참다운 학자들만이 다른 학자의 학문 세계를 올바르게 평가해줄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 세계에 대하여도 다산과 동시대를 살았던 뛰어난 학자들의 평가를 통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하는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면 다산과 직접 만나거나 편지를 통해 다산의 학문을 평가한 학자로는 대표적으로 세 사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석천 신작(申綽:1760∼1828)입니다. 신작은 다산의 『상례사전(喪禮四箋)』과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이라는 저서를 읽어보고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 또한 체제를 얻었으며 경전 주석에 대단
- 한국의 문화예술정책,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정치인과 교육계의 무지(無知)가 문화예술 발전에 있어서 최대 걸림돌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 70년 동안 이 사회를 지배해온 수구세력들, 세월호 사태에서 보았듯이 최소한의 도덕과 양심을 보지 못했다. 막말로 탐관오리였거나 권모술수에 능한 간신모리배들이 세력을 잡았던 시대가 있었다. 사이비 정치집단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정치인 행세를 해왔다. 그런 정
전통문화 테마파크 한국민속촌이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 7일부터 8월 19일까지 여름축제 ‘초록만발 조선하지로다’를 진행한다. 개성만점 캐릭터의 흥미진진한 공연과 대규모 물놀이, 조선시대 피서법 체험 프로그램이 가득한 여름나기 축제다. ‘선비들의 여름 따라잡기’ 체험은 초록빛 나무와 계곡으로 둘러싸여 평균기온이 주변지역보다 3도 가량 낮은 민속촌에서 즐기는 피서방법을 제안한다. 다산 정약용의 소설팔사에 제시된 옛 선비들의 더위 이기는 방법인 탁족체험, 매미소리 듣기, 그네타기 등을 직접 체험하며 무더운 여름을 극복했던 조상들
우리의 땅은 어딜 가나 강이 없는 곳이 없다. 강은 대개가 산과 들을 품고 있다. 깊은 산에서 첫걸음을 뗀 물길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과정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싱그러운 여름날을 만끽하기에 강만큼 좋은 곳도 드물다. 해서 설렘과 기대를 안고 달려온 두물머리.햇살 곱게 내려앉은 강가에 앉으니 녹색의 향연이 가득하다. 강을 건너온 습기 묻은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이게 한다. 여기저기 막 피어난 앙증맞은 들꽃들이 인사를 건넨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지나 여름을 보내고 있는 땅 위의 생명들이 대견해 뵌다. 강가로 나
6·13 지방자치 선거가 끝났습니다. 당선자들에게는 축하를, 낙선자들에게는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군 단위의 군의원으로부터 군수, 시 단위의 시의원에서 시장, 도 단위의 도의원에서 도지사에 이르기까지, 광역시의 시의원과 시장, 구의원에서 구청장에 이르기까지 몇천 명의 당선자가 나왔습니다. 옛날로 보면 그들은 모두 목민관이고, 공직자이자 공무원이면서 자신들을 선출해준 지역민들을 위해서 일해야 할 주민들의 지도자들입니다.다산 정약용은 지금과는 다른 당시의 목민관 제도에서, 목민관이란 지역만 작을 뿐 실제 하는 일이나 권한은 작은 군주에
공자(孔子)의 제자 안연(顔淵)이 있습니다. 3천 명이 넘는 제자 가운데 공자가 가장 사랑하고 믿으며 크게 칭찬했던 제자가 안연이었습니다. 안연이 두고두고 사용하던 말이 있었으니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순임금처럼 노력하면 순임금이 될 수 있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 亦若是)”라는 내용입니다. 율곡 이이(李珥)는 조선의 대현(大賢)이었습니다. 16세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생사(生死) 문제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우연히 불교서적을 읽고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보려고 금강산으로 입산하여 스님
지난 5월 5일은 세계적인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칼 마르크스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818년에 태어나 66세였던 1883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금년은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135년이 되는 해입니다. 마르크스가 태어난 1818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째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해였고, 그해는 바로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 『목민심서』가 탈고된 해이기도 합니다. 그해 다산은 57세의 중늙은이였고, 또 그해 가을에 다산은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간절하게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해배되어 가족들과 재결합이 이루어지던
입김 허옇게 추운 날, 장터에는 시방 국화꽃이 한창 피어나는 중이다. 꽃은 뜨겁고 볼록한 꽃봉투를 안은 이들은 걸음새가 바빠지게 마련이다. 그 온기를 식지 않은 채로 전하고 싶어서 종종걸음 하는 마음을 일러, ‘사랑’이라 한다.〈연탄장수 울 아비/ 국화빵 한 무더기 가슴에 품고/ 행여 식을까봐/ 월산동 까치고개 숨차게 넘었나니/ 어린 자식 생각나 걷고 뛰고 넘었나니〉 (오봉옥, ‘아비’ 중)장흥장에서 국화빵을 파는 하수정(66)아짐은 70년 넘은 국화빵틀로 국화를 찍어내고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워내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
1801년 귀양살이가 시작되어 길고 긴 18년째를 맞은 1818년 가을, 마침내 다산은 해배 명령이 내려 고향으로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신유옥사(辛酉獄事)로 생사를 넘나들며 모진 고문의 국문을 당할 때만 해도,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생각도 못했고, 귀양살이 동안에도 수시로 다산을 잡아다가 다시 국문하여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져,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기 어렵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다산에게 18년의 독서와 저술의 충분한 기회를 마련해주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만나
『목민심서』 200주년,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느라 가슴조리며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져내려던 다산의 뜨거운 마음이 오늘의 우리 마음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힘든 귀양살이에 찌들어 자신의 몸 하나 보살피기도 매우 어려운 때인데, 자신이 당하던 고통이나 아픔은 괘념치도 않으며, 나라와 백성 건질 일만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다산은 정말로 탁월한 애국자였습니다. 때는 1809년, 다산의 나이 49세, 9년째 귀양 살던 강진에는 한 여름 6월인데도 비가 오지 않아 극심한 가뭄으로 농민들의 마음이 타들어가던 때였습니다.그러한
귀양살이 18년에 240여 권의 경학연구서를 저술한 다산은 바로 이어서 경세학 연구에 전심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경학을 통해 인격을 갖춘 뒤라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논리가 경세학인데, 경세학의 첫 번째 저서가 바로 『경세유표』였습니다. 법과 제도를 제대로 개혁해야만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여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을 고치지 못하고 제도를 변경하지 못하는 것은 한결같이 통치세력의 어짐과 어리석음에 이유가 있지, 하늘의 이치가 원래부터 고치거나 변경시키지 못하게 하는
인간에 의해 역사는 만들어지고, 천재적인 사상가에 의해 어느 순간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기도 합니다. 1712년 프랑스에서는 장 자크 루소가 태어나고, 그가 50세이던 1762년 『사회계약론』을 출판합니다. 그해 조선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그가 57세인 1818년에는 『목민심서』가 저술되는데, 독일에서는 그해 칼 마르크스가 태어납니다. 1789년은 다산이 2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하는데, 사회계약론의 영향으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해 세계사에 큰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1867년은 마르크스가 50세의 나
'세계는 지금 가짜뉴스와 전쟁’이라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참으로 오랜 세월 악습으로 진행되는 패악한 ‘가짜뉴스’의 폐해를 언제쯤 차단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독일에서는 가짜뉴스 차단을 위해 법률의 제정으로 맞서고 있다는 보도와 함께 미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가짜뉴스가 판치고 있는가를 소상하게 보도해주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0분 사이에 24회의 사실과 다른 말을 퍼부었고, 1년 사이에 1950번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의 사실과 다른 주장을 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기가 막히는 내
2018년도 첫 여행지는 강변을 끼고 있는 남양주다. 산하가 꽁꽁 얼어붙은 이즈음 어디를 가나 한적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연인이나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 떠난다면 미음나루-팔당대교(댐)-능내역-다산유적지-두물머리-유기농테마파크-수종사-강변길-피아노폭포-서호미술관-모란미술관-몽골문화촌-축령산자연휴양림-스타힐리조트로 이어지는 길을 추천하고 싶다. 이 길은 수도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변 드라이브 코스다. 길 따라 눈요깃거리가 즐비하고 곳곳에 전망 좋은 카페며 맛집이 많다. 모든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해 우리 국민의 힘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국민은 안중에 두지 않고 일개 사인과 국정을 농단하던 대통령을 파면하여 감옥에 가두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아직 완성된 혁명은 아니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아있는 권력을 내리고, 새로운 권력을 창출해냈음은 분명코 ‘무혈혁명’이자 ‘명예혁명’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일은 나라답지 못한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리셋하기 위해 온갖 적폐를 말끔히 청산하여 국민이 주인인 나라가 되는 혁명을 완성해내는 일입니다. 금년은 특별히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유행가의 노랫가락은 이미자라는 국민가수의 목소리를 통해 만인들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으로 언제나 슬픔을 안고서 견디기 힘든 비애의 무드에 젖어들게 해줍니다. ‘기다림’이란 그렇게 애태우는 일이요, ‘멍’이 드는 일이며, ‘외로움’을 참아내기 어렵게 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기다려야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어,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참으며 살아갈 때가 많기도 합니다. 오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57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