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인돌박물관쪽에서 보는 옛 매산마을엄마! 정월도 가고 이월도 가고 삼월이 왔는가 싶더니 벌써 흘러가고 있어요. 3월, 음력으로 3월, 이 계절이면 엄마가 참 많이 바쁘곤 했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응? 그곳에서도 여전히 바쁠까? 그곳에서도 여전히 제수음식을 장만하느라 열흘도 전부터 이것저것 준비하고 고민하고 의논하고 장을 보러 다니느라 밤낮으로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을까?그래요. 매년 돌아오는 그날이 금년에도 어김없이 왔어요. 산에는 산벗꽃이 화들짝 놀란 것처럼 피었고요. 진달래는 언제 그렇게도 많이 피었는지 모르게 피었다가 벌
# 우리마을한때는 인구 삼백여 명을 헤아렸다지만, 지금은 전부 해서 스무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우리 마을 한쪽 귀퉁이에서 때 아닌 난리가 벌어졌다. 고추모종 같은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한 경우가 아닌 한 세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장면을 구경하기조차 어려워진 오늘날의 상황에서 무려 다섯 명이나 모여앉아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섯 명이면 우리 마을 남자들은 거의 다 모인 셈이었다. 인구가 전부 해서 열세 가구 열아홉 명이라고는 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 할머니 혼자,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딸과 친정엄마, 등
# 액셀 파이프 위에 부어놓은 흙무더기들난방비를 줄인다고 기름보일러 대신 연탄보일러를 설치했더니 뭐냐 이거, 삼 년도 안 돼서 삭아 버렸다. 철판이 부식되는가 싶더니 그대로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이게 뭐냐. 명색이 철판인데 이래도 되는 거냐? 보일러 판매점에 가서 물었더니 연탄가스란 게 원래 그렇단다.“아, 그것이 보통 독한 것이간디.”그러면서 새로 나온 보일러가 있다고 그것을 권한다. 스테인리스란다. 예전 것은 일반 철 파이프에 일반 철판이라서 수명이 짧았다고, 스테인리스 파이프에 스테인리스 철판은 삼 년 이상 오 년까지도 가능
# 부안 모항의 풍경지난겨울은 혹독했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혹독한 추위도 물러가고 봄이 왔으니 좋다고 할까? 꽃구경 가자고 날짜 정하고 장소 정하고 김밥 재료도 준비하고 그럴까? 집에서나 밖에서나 눈에 띄는 것은 오직 콘크리트뿐인 대도시 시민들이야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농촌의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기는커녕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추위가 어찌 몸으로 직접 와 닿는 추위만 있겠는가.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덜덜 떨게 하는,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추위도 사람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우리 고장 고창의 최대 작물
#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은 갯벌자전거를 타고 갯벌을 달리면 어떨까. 무엇이 새로 보일까. 무슨 새로운 소리가 클래식 음악처럼 부드럽게 귓전을 파고 들어와 줄까. 트렉터를 타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혹은 볼 수 없었던 무엇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나 여기 있었다는 듯 새롭게 나타나서 나를 감동시키고 놀래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는지 모른다. 갯벌에서 조개잡이 노동을 시작한 지난해 9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툭하면 그런 생각 아니 유혹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데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채
2012년에서 2013년으로 넘어가는 분기점, 그 겨울은 참으로 황홀했다. 객관적인 지표가 어떠했는지까지는 내가 모르겠고, 적어도 내 개인적으로 그랬다. 황홀했다. 황홀한 겨울이었다.방에서도 얼음이 꽁꽁 얼 정도로 무진장 추워져나 버려라, 했더니 정말로 그렇게 추워졌다. 마당에서도 길을 잃을 정도로 눈이나 왕창 쏟아져라, 했더니 정말로 눈이 내렸다. 아니 쏟아졌다. 내 소원이 이렇게도 단기간 내에 이루어진 예가 일찍이 한 번이나 있었던가, 과거를 더듬어보고 또 살펴봐도 그런 신기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하도 신기해서 집을 나서기
자전거를 보면 내 마음은 설렌다. 오래된 자전거를 보면 향수까지 더해져서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 향수가 무슨 향수인지 나는 모른다. 자전거에 그 무슨 고향의 이미지가 덧칠해져 있을 까닭은 분명 없다. 그런데도 오래된 자전거를 보면 고향의 어떤 것들이 중첩되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허둥거린다.그날도 그랬다. 처음부터 그것이 자전거라고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손수레인 줄 알았다. 멀리서 본 까닭이었을 것이다. 손수레 치고는 뭔가가 많이 이상했다. 한눈에도 온갖 잡동사니들이 실려 있어서 폐지 수집용이라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소금 굽는 가마그 이름을 들으면 영화배우 정우성을 떠올리게 되는 정우성(53세) 씨는 할 말이 많다. 아니 그것은 하고 싶은 말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할 말은 하면 되지만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대개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마련이다. 그러나 입이 안 열린다. 겨우 어떻게 입을 열었다 해도 하고 싶은 말은 안 나오고 에먼다리나 긁다가 말아버리기 십상이다. 내 말이 상대를 화나게 하면 어쩌나, 내 말이 상대를 아프게 하면 어쩌나, 마음이 여린 자의 마음은 노상 이런 걱정을 한다. 걱정이 많다 보니 하고
# 어느 맑은 날 석양의 갯벌부부가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되기까지 십칠 년 걸렸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 사람답게, 부부답게, 가족답게 살아가는 기반을 잡기 위해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따뜻하게 살아갈 집을 짓고 완전히 결합하기까지 십칠 년. 그 간난신고의 역정은 엄숙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는 아마 우리나라 서민 생활의 평균 이상이라고 봐야 것이다. 주택보급률 백 퍼센트를 달성했다는 뉴스가 나온 지도 오래건만, 평생을 살았어도 집 한 채 못 가진 사람이 수두룩한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니까 말이다.어쨌든 그의 이름 김
# 3월을 기다리는 실장어 잡이 조각배들겨울이면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툼해지고 행동에도 변화가 오듯이, 바다도 겨울이면 순발력이 떨어져서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한다. 이를 가리켜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한 번 나가면 들어올 줄을 모르고, 일단 들어왔다 하면 또 나갈 줄을 모르는 것이 겨울바다여, 잉?”들고 나는 물의 흐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썰물이 완료된 뒤의 바다는 참으로 멀리까지 나가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안 들어온다. 밀물이 완료된 뒤의 겨울바다는 참으로 풍성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안 나간다. 저
# 내복이 말라가는 풍경고창군 심원면 두어리 한쪽에 자리한 그 댁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을 꽉 채운 것은 빨랫줄이었다. 빨랫줄에 널린 내복 중심의 빨래들, 그것을 보자마자 내 기억은 저 아득한 유소년기를 더듬고 있었다. 겨울이면 햇살이 살가운 날에 엄마가 아이들의 내복을 죄다 벗겨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툭, 툭, 하고 이를 잡던 장면, 아, 그것이 사랑이었던 것을, 사랑이었던 것을….사랑에 관한 전설은 많기도 하다.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떤 사람은 상대를 자신의 틀 안에 가
# 기계가 고장나면 아주 진지해지는 김대웅 씨사람은 무조건 대도시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얘기하면서도 내 자식은 농사꾼 안 만들겠다는 유행이랄까 뭐랄까, 도시 위주의 정책에서 파생된 이 우울한 풍경은 아직 끝나지 않고 여전히 진행형이다.다른 한편에서는 귀농이다 귀촌이다 해서 도시에 안녕을 고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경쟁에서 밀려난 자신을 돌아보며 경쟁이 덜하다고 여겨지는 시골로 내려가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도시의 냉혹함이 싫다 해서 무작정 이삿짐을 꾸리기도
# 트렉터에서 갯벌로 막 내려진 종패자루아직 어둠의 기미가 남아 있는 이른 아침, 불 깡통을 들고 트렉터에 올라타서 막 출발하려는 참인데 웬 아줌마가 훠이훠이 달려와서 트렉터에 매달렸다. 가슴장화에 파란 비옷을 입고, 테러리스트의 두건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 오징어 모자를 꾹 눌러쓴 까닭에 누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트렉터 운전석에 앉은 우리의 젊은 농장주는 같은 마을에 사는 까닭으로 벌써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농장주도 아줌마의 돌연한 출현이 다소 놀라웠던 모양이다. 운전석에서 뛰쳐나온 그가 아줌마를 향해 다가서면서
# 아주 부드러운 느낌의 모래밭 같은 갯벌아,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겠구나.뜬금없는 곳에서 느닷없는 생각 하나를 얻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뜬금없다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지난 삼 개월 여동안 거의 매일이다시피 출근해 온 주차장이었다. 갯벌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자동차 문을 열려 하는데 아줌마 한 분이 고무장갑 낀 손가락을 입에 대고 호호 불며 다가왔다. “나 쪼깨만 태워다 주시오 야?”아주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눈 바는 없지만 안면은 충분했다. 내가 집에서 갯벌을 오가는 길목 어디쯤에 그녀
# 누가 그린 그림일까갯마을 여기저기에 장작이 쌓여 있어서 저 장작의 용도가 뭘까, 내심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것을 알겠다. 바야흐로 겨울이다. 손이 시리다. 아 정말로 손이 시리다. 발끝도 시리다. 깨질 것 같다. 아니 깨지는 것 같다. 바지락이나 혹은 조개껍질이 발에 밟혀 깨질 때마다 소름이 온 몸으로 좍좍 흐른다. 내 발가락이 그렇게 깨지는 듯한 느낌이다.장갑을 끼고, 그 위에 또 장갑을 끼고, 별 짓에 별 짓을 다 해봐도 그때뿐이다. 아니 그 순간뿐이다. 축축한 흙 한 번 만지고 나면 도로아미타불, 아이고 손 시려, 소리가 절
# 햇빛 쩡쩡한 날의 먹구름11월 들어 사흘거리로 비가 내린다. 무와 배추가 한참 물을 필요로 하는 계절에는 한 방울도 안 내리던 비가, 이제 아무 필요도 없는 계절 11월에 접어들면서 마치 장마철의 그것처럼 자고 나면 내린다. 게다가 바람은, 서 있는 사람의 머리털을 죄다 뽑아낼 듯이 거세게 몰아치는 이 바람은 또 무슨 바람이란 말인가.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보자면, 심술도 이런 심술이 없다.갯벌에서의 비바람은 내륙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륙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쨌든 피할 곳이라도 있지만, 갯벌에서는 감히 피할 생
# 정상적인 종패뿌리기바람이 매우 심하게 불었다. 바다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바다는 들어온 채 나갈 줄을 몰랐다. 술은 내가 마셨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는 내용의 시 한 구절이 절로 생각나는 날이었다. 바닷물 속에서 바닷물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물은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나가기는커녕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제 물이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십 년을 갯가에서 갯물을 먹고 살았어도 바다의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엄마, 벌써 가을이에요. 가을도 아주 깊은, 아침에는 어깨가 오슬오슬 떨려서 외투를 걸쳐야 하는 겨울 같은 가을이에요. 게다가 오랜만에 빗소리마저 들리네요. 그러니까 지금은, 빗소리가 들리는 깊은 가을의 새벽인 거예요. 그래서일까? 한밤중이라고나 해야 할 새벽 2시 무렵에 잠을 깼는데 더 이상은 잠도 안 오고, 다른 무엇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멍하니 앉아서 커피나 자꾸 마시고 싶은 거 있죠. 사실은 추석이 지난 이후부터 내 마음이 줄곧 심란해서 말이에요.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차분히 앉아서 이런저런 곰살스런 일들을 꽤
# 라면이 있는,아주아주 양호한 간식시간하루에 잘해야 세 시간 일을 하고, 짧을 때는 딸랑 한 시간 만에 끝나기도 한다는 말에 어떤 사람이 관심을 표명해 왔다. 자기도 그 일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아, 이런 오해가 생길 줄이야. 내가 보기에 그는 십 분도 못하고 나가떨어질 타입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공사장 막노동판에서도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경력이 한 번도 아니고 두세 차례나 있었으니까. 편한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게 갯벌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난감했다. 작업 시간이 한
# 소금창고와 염부의 사택우리는 오늘도 어제와 같은 트렉터를 타고 어제와 같은 갯벌을 달렸다. 어제 갔던 길을 오늘도 가고 있었지만, 길은 이미 어제의 그 길이 아니었다.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려놓고 다음날 아침에 보면 모두 사라져 있듯이, 어제 그토록 많은 트렉터와 경운기와 사람들이 왕래를 했음에도 바다는 어느새 그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해봐” 하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오늘은 이른바 ‘두 탕’을 뛰는 날이다. 아니다 참, ‘세 탕’이다. 아니, 아니, 그것도 아니다. 이것 참 계산이 복잡하다. 달력에